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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해왔나?‘잉여인간’, 사회적 삶의 후기자본주의적 논리
권성수 리뷰어 | 승인 2016.08.15 14:34

정수남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의 「’잉여인간’, 사회적 삶의 후기자본주의적 논리: 노숙인·부랑인을 중심으로」(『한국사회학』, 2014년 10월)에서는 노숙인의 사회적 삶을 후기자본주의적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그들에 대한 ‘장치’의 꾸준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노숙인은 사라지기는커녕 정체되거나 더 늘어나는 역설을 감정사회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잉여인간으로서
노숙인과 부랑인


바우만은 ‘잉여인간’을 전통적 의미에서의 실업자나 노동예비군과는 전혀 다른 범주로 설정하면서 ‘인간쓰레기’라고 명명하는데, 이들은 근대사회의 설계와 질서구축 과정에서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된 부작용으로 정의된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잉여인간’이라는 표현은 1990년대 이후 세계화, 국제이주, 노동시장의 유연화, 금융자본의 공세, 복지지체 및 후퇴 등에 따른 불법체류자, 탈북자, (장기)실업자, 백수, 노숙인 등 노동시장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이들을 빗댄 수사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정의된 잉여인간 중에서 저자가 특별히 주목한 대상은 노숙인·부랑인이다.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생산 기능은 물론 가정이나 사회 영역 전반에서 제 기능을 상실한, 그래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노숙인의 등장이 최근 일은 아니지만 1990년대 중반 IMF 이후 실업, 파산, 도산 등을 겪은 이들이 많아지면서 급증했으며, 당시 이들을 돕기 위한 단체나 복지정책이 서둘러 마련되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노숙인에 대한 사회정책이 점차 세분화·전문화되면서 미시권력적 장치들이 확대되었다고 본다.
 

"노숙인·부랑인은 복지 및 의료담론의 분류체계에 따라 역사적으로도 각기 다르게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분류나 정의는 시대적 맥락에 따라 중복 혹은 구별되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시설들(쪽방, 쉼터, 보호소 등) 중에서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가에 따라 공간적 통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87쪽)


“이러한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노숙인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거나 이들의 사회복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장치들은 효과가 없는 것인가? 그럼에도 왜 계속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당장 찾기 어렵다면 질문을 다르게 던져보자. 이러한 장치들은 자활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통치기제로 작동하면서 노숙인을 잉여인간으로 범주화하는 지속적인 담론체계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노숙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범주의 인간집단으로 우리 주변에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닐까?” (288쪽)


감정사슬
‘혐오-동정심’에서 ‘공포-적대감-무관심’으로


저자는 노숙인에 감정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뒤르켐에 의하면 사회적 분위기에 배태되어 있는 감정은 특정한 지향성을 지니는데, 이 지향성은 개인이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을 구성한다. 이때 집단은 감정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며, 일련의 감정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감정적 분위기는 ‘공통의 사회구조와 과정에 연루된 개인들로 집단을 이루면서 공유하는 집단감정이며, 정치적·사회적 정체성과 집합행동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련의 감정 또는 느낌’이다. 이렇게 형성된 감정적 분위기는 “개인의 행동에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집합행위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 이전까지 노숙인에 대한 대중의 감정적 분위기는 ‘혐오-동정심’ 감정사슬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노숙인들의 질병, 불결함, 범죄에 두려워하면서도 이들의 삶을 애처롭게 여겼는데, 그 이면에는 동정심과 연민이라는 ‘배후감정’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랑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은 이들을 통제하는 행정권력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즉, 1960년대부터 부랑인 ‘정화’작업이나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대대적인 정화사업은 부랑인들을 격리시설로 몰아넣었으며, 이처럼 비가시화된 이들은 대중에게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추상화된 혐오의 대상이 되어갔다.

반면, 격리시설 밖에서 살아가는 부랑인이나 노숙인은 대중적 동정심이나 연민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 종교단체나 민간 자선단체들은 이러한 감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부랑인을 ‘더럽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는 행정권력과는 별개로 이들을 ‘불쌍하고 애처로운’ 존재로 규정하는 자선 권력이 개입한 것이다. 즉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이들의 생사를 관리해야 하고, 민간기관은 구호활동의 명분을 대중들의 동정심으로부터 얻어야 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노숙인·부랑인에 대한 대중들의 동정심과 연민은 다른 감정사슬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바로 노숙인을 비위생, 게으름, 불성실, 의지박약, 신용불량 등으로 표상하면서 공포-적대감-무관심’의 감정사슬이 형성된 것이다. 이 사슬 안에서 노숙인은 더 이상 강제보호나 시혜만으로 관리가 불가능해졌고,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지 몰라도 더욱 세밀하게 관리되고 체계적인 원격관리를 받게 된다. “즉, 자유롭게 배회하되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고, 관리·감시를 받되 배회하면서 받는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노골적으로 사회적 부를 좀먹는 기생충들이자 잠재적 위험의 대상이 되었다.” (297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잉여인간은 잠재적인 위험으로 표상된다. 여기에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작동하지만 결국 동일한 감정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잉여인간에 대한 연민정치가 작동하는데, 이는 이들의 처량함과 불쌍함을 외면하는 사회적 냉혹함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인간에 대한 공포정치가 작동한다. 잉여인간들의 일탈과 범죄(알코올중독, 게임중독, 절도, 폭력, 살인 등) 때문에 사회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불안감이다. 결국 연민정치와 공포정치 모두 사회가 위험하다는 담론을 공유하게 되며 사회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경제적 효율성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한 인간이 된다.” (298쪽)

그렇다고 공포와 적대감이 심화되었다고 해도 동정심과 연민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이것이 심화되자 결국 “동정심 피로”를 이끌어내면서 대중들은 이제 노숙인을 냉담함과 무관심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저자는 감정의 역동적인 속성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현상은 동정심이 프로그램화되고 기계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역설적인 결과라고 말한다. 하나의 감정을 지나치게 소비하도록 요구되면 오히려 그 감정에 반하는 감정이 출몰한다. 이와 관련해 메스트로비치는 후기 근대적 상황을 탈감정사회라고 규정하면서 ‘지성화되고 기계적으로 대량생산되는 감정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탈근대사회는 연민이나 동정심이 사라지는 감정결핍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동정심 피로를 느끼는 감정과잉사회라고 분석한다.

이후 논문은 오늘날 노숙인·부랑인이 생산되는 후기자본주의적 논리를 통치성과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감정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즉, 저자는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공포감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공포가 개인화되는 메커니즘을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이론화하며, 이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복지정책이 노숙인에게 자활과 자조를 목표로 설정하게 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로써 노숙인은 새로운 게임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감정자본은 이들이 자활에 성공하는 시민으로 거듭나느냐 아니면 계속 노숙인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노숙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위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노숙인들 중 상당수는 국가나 사회의 ‘체계적인’관리가 그리 필요 없는 사람들일 수 있다. 실제로 노동의욕과 능력이 있는 노숙인들은 주거와 일자리만 보장되면 당장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자아통치(규율)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무기력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노숙인들도 존재한다. 이처럼 노숙인들은 복지장치의 엄격한 관리와 자발적인 자기관리 사이에서 어딘가에 존재하는 애매한 주체들이다. 그런데 이 모호한 경계의 틈새로 다양한 복지장치들이 물꼬를 틀듯이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배제하면서 동시에 관리와 포섭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이중 메커니즘 속에서 노숙인은 사라지기보다는 적정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일이다.” (316쪽)

통치성의 개념을 통해 실제 노숙인들이 어떻게 주체화 되는지 규명하는 본 논문은 잉여인간으로서 노숙인을 예시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여집합인 체제 내 인간들 역시 어떻게 주체화되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잉여인간과 현재 많이 연구되고 있는 감정사회학이 어떻게 주제를 분석하는지 접할 수 있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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