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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는 어떻게 실록에 이름을 남겼을까?조선 후기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생애와 정치적 향배
홍혜원 리뷰어 | 승인 2016.07.04 09:26

<여인천하>나 <용의 눈물> 같은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궁중에서도 여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중신 혹은 외척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주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조선 후기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생애와 정치적 향배」(『여성과역사』 22, 2015년 6월)는 궁중의 여인들 중 화완옹주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논문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덜 진척된 탓인지 연구자는 1차 사료와 선행연구문헌들을 바탕으로 화완옹주의 삶을 서술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1차 사료로는 『영조실록』,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화완옹주가 언급된 자료를 모았다. 때문에 정치적 등락으로 본 화완옹주의 삶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완옹주는 옹주로서 정치적으로 거론된 특이한 사례이기에 주목해 볼 만하다.


영조대
화완옹주의 삶

영조 어진.

“조선시대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를 말한다(135쪽). 화완옹주(1738-1808)는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막내딸로, 영조의 9녀이다. 사도세자의 동복누이이며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12세 때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에게 시집갔으나 슬하에 낳은 딸이 2세에 죽고, 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되어 남편 정치달도 20세에 요절했다.”(134쪽)

“아버지 영조는 자식들 사이의 편애가 유달리 심했는데, 화평옹주와 화순옹주, 화완옹주, 사도세자를 매우 사랑한 반면 화협옹주는 덜 사랑하였다. 화순옹주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을 불쌍히 여겨 영조의 사랑을 받았고, 장녀 화평옹주는 오라비 사도세자를 귀하게 여겨 친하게 지냈고 성품이 무던하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 반면 화협옹주는 태어났을 때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인 것을 슬퍼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136-137쪽)

 

영조 가계도.


화완옹주가 11세 되던 해에 첫째 언니 화평옹주가 딸을 출산하다가 죽었다. 특별히 사랑하던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는 그 다음으로 아꼈던 화완옹주에게로 정을 옮겼다. 화평옹주가 죽은지 1년 후에 화완옹주는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였다. 영조가 부마 후보들 가운데 정치달을 택한 것에는 영조와 정씨 가문의 인연, 정우량 형제의 탕평파로서의 성격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사가에 자주 들렀으며, 화완옹주가 딸을 낳았을 때에도, 그 딸이 죽었을 때에도 거둥하였다. 화완옹주의 딸이 죽은지 한 달도 못 되어 남편 정치달이 요절했다. 같은 날 중전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였으나, 영조는 승정원 및 삼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위의 집으로 문상을 갔다가 밤에야 궁궐로 돌아왔다. 여기서 영조가 자신의 아내인 정성왕후 서씨보다 화완옹주와 부마 정치달을 더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20세에 딸과 남편을 모두 잃고 과부가 된 화완옹주를 배려하여 궁궐로 들어와 살게 했다. 그리고 정치달의 형제인 정석달의 둘째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정해주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화순옹주의 남편이 병으로 죽고, 화순옹주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여 죽었다. 아끼던 화순옹주와 부마의 죽음으로 고통을 받은 영조의 사랑은 그 후 더욱 화완옹주에게 집중되었다.


정조대 ‘정처’시절의
화완옹주

정조 어진.

화완옹주는 생모 영빈 이씨와 함께 사도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은 임오화변(1762년)에 관련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41쪽). 또한 영조의 총애를 믿고 양자 정후겸과 함께 후일 정조가 되는 왕세손의 대리청정(1775년)을 반대했다. 이는 다음 해 정조 즉위(1776년) 후 화완옹주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는 원인이 된다.

정조가 즉위하자 삼사의 관료들은 화완옹주의 작위를 삭탈하고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완옹주를 처벌하는 것은 선대의 은덕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여겨 영조의 3년상 동안에는 화완옹주를 보호하였다(141쪽). 그러나 신하들이 여러 차례 화완옹주를 ‘정처’라 칭하며 국법대로 처치하기를 상소하자, 마침내 정조 2년(1778년)에 화완옹주의 작호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부로 유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정처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멈추지 않았다. 정조는 선왕의 뜻을 기려 더 이상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교했고 처벌을 주장한 신하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화완옹주를 교동에 유배 보냈지만 정조는 가끔씩 문안을 하였다. 정조 6년(1782년) 정조는 화완옹주를 강화도에서 정치달의 묘가 있던 파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이때에도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정조는 여러 차례 반대를 물리쳤다. 또한 화완옹주에게 철마다 병 위문을 하였으며, 마침내 파주에서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했다.

마침내 정조는 승하하기 1년 전인 정조 23년(1799년)에 정처의 죄명을 없애고 완전히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후 순조 대에도 탄핵이 있었으나 순조도 윤허하지 않았다. 순조 8년(1808년) 화완옹주는 71세의 나이로 죽었다(149쪽).
 

화완옹주 및 정치달 묘역. 경기도 파주 소재.

 

부마 정치달과
양자 정후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친 정우량은 영조대 초반부터 정국에 참여하였고 아우 정휘량과 함께 영조의 탕평책을 뒷받침하여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노론 중도파의 대표자였던 정우량의 아들을 부마로 삼음으로써 그와 사돈관계를 맺어 탕평의 기반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정치달이 화완옹주의 부마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영조와의 인연 및 정우량 형제의 탕평파로서의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화완옹주와 부마 정치달을 매우 사랑하였으나 정치달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했다(151-152쪽).

왕실에서는 옹주가 아들 없이 홀로 되면 왕이 즉시 양자를 정해주었다. 화완옹주는 남편 정치달의 10촌 형인 정석달의 둘째 아들 정후겸(1749-1776)을 양자로 맞았다. 정후겸은 18세에 대과에 합격하자마자 영조의 총애를 받아 빠르게 출세하여, 20대에는 공조참판(종2품)으로 당대의 실권자가 되었다. 정후겸은 노론 벽파와 외척세력에 속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연루되었고, 영조와 화완옹주의 총애를 배경으로 정조의 왕위계승을 위협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공작을 폈다.

정후겸은 영조 51년(1775년) 훗날 정조가 될 왕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는 등 세손을 궁지로 몰았다. 정조는 즉위 후 바로 정후겸을 유배 보냈다가 사사하였다. 이때 정후겸의 나이는 28세였다.


글 초반에 언급했듯 본 논문은 여성이지만 정치사에 기록을 남긴 화완옹주의 삶을 조명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사료와 선행연구에 근거했기 때문에 다소 밋밋한 면이 없지 않으나, 화완옹주를 둘러싼 인물들의 구도를 명료하게 설명했고 화완옹주의 거취에 대한 대소신료들의 상소와 정조의 하교 내용을 풍부하게 수록하였다. 여성사의 관점에서 화완옹주의 생애와 조선 후기의 정치를 엮어보려 한 연구자의 시도가 돋보이는 논문이다.
 

홍혜원 리뷰어  hhw33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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