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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이 사대부 노래"라니, 민중의 넋도 가로채나?정우택 성균관대 교수의 「정선아리랑의 정립과 기원의 창조」
강성민 리뷰위원 | 승인 2016.01.29 15:38
1950년대 후반 OS레코드에서 발매한 <아리랑 고개 넘어> LP음반.(정선아리랑 연구소 소장자료)

15년도 넘은 과거의 어느 날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아는 사람 차를 얻어 타고 강원도 내륙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차 안엔 정선아라리가 한창이었다. 차의 주인이 특별히 챙겨 넣었다가 틀어준 것이었는데, 여러 명인이 부르는 정선아라리를 릴레이로 제대로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오르내림이 심한 국도를 따라 펼쳐진 산과 마을, 산비탈에 일궈진 밭들, 산과 산 사이를 흘러가는 물들이 점점 우리를 더 깊은 국토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 여긴 정말 깊구나, 이 깊은 곳에서 누군가는 살아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어떤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정선아라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이 노래가사는 정선아라리를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입에 감도는 앞부분 가사다. 그런데 성균관대 국문과 정선아라리 조사팀에 따르면 달랐다. 정우택 성균관대 교수의 「정선아리랑의 정립과 기원의 창조」(『국제어문』 65호, 2015)에 따르면 조사팀은 1982년 1월부터 현재까지(최근 2015년 4월) 정선을 직접 답사를 통해 아리랑을 채록하고 아리랑과 관련한 인터뷰 등을 수행하고 있다. 1982년부터 1987년(제5차 조사)까지 조사한 것을 데이터로 삼아 '정선의 아라리' 자료집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1982년 1월부터 1987년 1월까지 정선 전역에서 60판의 조사판을 벌여 정선지역 주민 508명을 대상으로 정선아리랑 7,368편을 채록했다. 그런데 당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의 순위는 “눈이 올라나”로 시작하는 그것(80회)이 아니라 “아우라지 뱃사공 아저씨 배 좀 건네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정 교수는 “이런 빈도수로 볼 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가 정선아리랑의 대표곡으로 선정된 데 는 또 다른 이유와 맥락이 있으며” 여기엔 “아라리의 기원설과 그 주체성이 관련되어 있어 중요하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중요한 대목을 하나 인용하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서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이조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선비들 중에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立志) 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겻드려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 한다.”(『정선군지』, 1978)

 

그 이후 정선아리랑의 고려 유신 기원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주로 강원도 지역 관련 단체 등에 의해서였다. 그러자 정선아리랑의 고려 유신 칠현 기원설은 광범위하게 수용·재생산되는데, 신경림의 『민요기행』,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등 대중적 영향력이 큰 단행본에 실려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나왔다. “아라리를 고려 말의 충신들과 연고나시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상층의 고급문화화 하려는 욕망에서 발로된 것으로 “그런 기대는 존중될 필요가 있지만 학술적 설득력은 없다”는 김시업 성균관대 교수의 비판이 그러하다.

그 이후에도 정선아리랑의 기원과 주체를 둘러싼 상징투쟁은 계속되었다. “2006년까지 카세트테이프 33,800개, LP 500장, CD 14,000장, DVD 1,000개 등 총 49,300개를 제작 발매·배포하였다. '정선아리랑' 책자도 16쇄를 거듭하며 배포되었다. 미디어를 통한 정선아리랑의 보급은 정선아리랑의 유래와 성격, 악곡 등이 표준화·고정화·정본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논문 58쪽)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이런 증언이 있었다.

 

“상당히 천시했어요. 아라리 부르는 분들을. 천시를 해 가지고 그때쯤만 해도 행세를 하는 사람들, 지역에서 유지니 하는 뭐 이런 사람들, 그 자녀들이 서당 같은 데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전혀 못 부르게 했어요. 심지어는 부른다 할 것 같으면 매를 때리고 그랬어요. 남의 일꾼들이나 부르는 소리라고……”

 

즉, 정선의 유지급에서는 아라리를 천시했고 부르지 않았는데, ‘천한’ 아라리를 정화하고 고급화하기 위해 ‘고려유신-사대부’가 만든 노래로 재창출했고, 그 재창출 과정에서 유신 이데올로기가 가미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숭고한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후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얘기라면 우리가 오늘날 듣는 이 정선아라리의 기원은 그 어드메일까. 필자는 정선 북면 고양리 큰골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늙은 소리꾼 고故 김병하의 증언을 제시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을 읽어보시라. 기원에 대한 논쟁이 부질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눈이 올라나’의 ‘만수산’과 남면 거칠현(居七賢)에 대한 인위적인 연결일 뿐입니다. (…) 서민들로 하여금 언제 났는지는 몰라두 임이 그리워서두 소리가 나올끼구 배가 고파서두 소리가 나올끼구 모든 것이 그리움뿐이니까 그 외로움에서 나는 자연히 소리가 생겼으리라 보지요. 외로움과 그리움에 의해서 이 민요가 발생되었다고 보지 그 고려 말의 충신들이 임금이 그리워서 만들었다고는 나는 못 본다 이거지요. 전오륜이 내려온 것과 아라리는 관계없다 이거지요. 우리 소리를 보면은 누가 창작을 해서 만들어내는 소리가 아니예요. 누구 입에서 나왔든 간에 그 많은 군중 입에서 그 많은 민중들이 백성들이 나름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 그 의견을 소리화시켰고 고 다음에 산에 올라갈 때는 힘이 드니까 산천을 바라보면서 소리하면서 힘든 줄 모르게 올라가고, 항상 생활에다가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소리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거고 또 소리 가락이 한 가지로 한정돼 있지 않은 것이고 각양각색으로 부른다 이겁니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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