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2015 문학/예술
속물연애 전성시대 묘사...개념적 밀도는 떨어져영화 <남자사용설명서>를 통해 본 오늘날의 연애 풍속도
박일귀 리뷰어 | 승인 2016.03.26 08:51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한 장면.

얼마 전 국내 모 대학의 ‘진로와 취업 설계’라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과제로 요구한 ‘황당한 이력서’가 논란이 되었다. 이력서 항목에 신체 사이즈와 태몽, 자신의 외모 순위, 잘생긴 신체 부위, 성형을 원하는 부위 등이 제시되어 있었던 것. 기업의 직무 능력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력을 써 내라는 교수에게 불쾌감을 느낀 학생들은 이에 반발했고 언론도 이 사건을 기사화하여 대중에게 보도했다. 하지만 정말 ‘황당한’ 사건인가? 외모가 경쟁력이고 ‘취업 성형’이 성행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건이라고 말하면 이상한가?

취업은 첫 번째 관문에 불과하다. 이제는 연애와 결혼을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고 연애와 결혼 자체가 스펙이 되어 가고 있다. 정영권 단국대 연구교수는 논문 「<남자사용설명서>, 키치 감수성, 상품미학」(『씨네포럼』 22, 2015년 12월)에서 영화 <남자사용설명서>를 통해 연애가 점점 스펙화하고 자기계발화하는 사회적 단면을 진단한다. 특히 ‘키치 감수성’과 ‘상품미학’이라는 두 개념(또는 분석틀)을 가지고 영화를 독해했다.

 

키치와 
상품미학

주인공 최보나(이시영 분)는 광고회사의 조감독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자신을 꾸밀 시간이 없다. 남자 직원들은 예쁜 여직원 주변에만 몰려든다. 항상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는 보나는 언제나 찬밥 신세다. 남자 친구도 없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늘 어려움을 느낀다. 자기 관리가 안 되어 있는 몰골 때문에 광고를 발표할 황금 같은 기회도 박탈당한다.

이때 닥터 스왈스키(박영규 분)가 의기소침한 보나에게 ‘남자사용설명서’라는 비디오테이프를 권한다. 반신반의하며 테이프를 틀자 온갖 진부한 ‘남자 꼬시는 방법들’이 튀어나온다. 닥터 스왈스키의 과장된 설명과 조수들의 연애 시범이 이에 곁들어진다. 또 알록달록한 배경화면, 밤무대 가수를 연상시키는 복장, 흑백 미니 TV, 지시에 따르는 조수 등 갖가지 저속하고 유치한 키치로 가득하다. 영화 자체도 말풍선이 끼어들거나 맥락과 상관없는 광고 이미지가 삽입되는 등 형식적 과잉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필자는 정의하기 애매한 ‘키치’라는 개념을 우나미 아키라의 ‘키치 감수성’을 빌려 설명한다. 키치는 원래 진짜를 흉내 낸 가짜 싸구려 예술품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우나미 아키라는 ‘본질 그 자체의 가치가 희박해지고 있으므로 여분의 것, 장식적인 것을 부가함으로써 겨우 무언가가 성립’하는 것으로 키치 감수성을 설명한다. 즉, 키치 감수성을 본래의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하나의 과잉(잉여)으로 본 것이다.

필자는 다시 이 키치 감수성을 ‘상품미학’과 연결시킨다. 볼프강 F. 하우크Wolfgang F. Haug는 상품미학을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교환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가치 이상으로 미적 가공을 하는 것, 쉽게 말해 상품의 본질과 상관없이 팔기 위해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라고 했다. 또 구매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건 상품에 의한 욕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충족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건 사용가치 자체가 아니라 사용가치의 약속이라는 말이다.

닥터 스왈스키는 바로 이 사용가치의 약속(남자를 사용해보기 위해 비디오의 사용가치를 믿어보라는 약속)을 설파한다. 상품을 팔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과잉의 퍼포먼스로, 키치 감수성으로 비디오의 쓸모를 주장한다. 이것이 닥터 스왈스키의 키치 전략이다. 스왈스키는 비디오를 팔기 위해 비디오라는 자기 상품을 미적으로 가공했듯이, 남자를 사용하기 위해(연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자신을 미적으로 가공하는 비법을 보나에게 전파한다. 결국 그 비법으로 보나는 인기스타 승재(오정세 분)의 마음을 얻는다. ‘보나와 닥터 스왈스키’의 관계는 ‘보나와 배우 승재’의 관계와 미묘하게 중첩된다.

 

구애의 언어,
광고의 언어

로맨틱코미디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구애하는 남녀가 나온다. 인간이 자신을 아름답게 꾸며 이성에게 구애하듯, 상품도 소비자에게 팔리기 위해 스스로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 대량생산되는 상품이 팔리려면 광고까지 가세해야 한다. 닥터 스왈스키가 상품을 팔려고 끊임없이 지껄이는 것도 일종의 광고의 언어이자 구애의 언어다. 이때 광고 자체도 이미 키치적 상품이고 전달 양식도 키치적이다.

닥터 스왈스키는 이 상품을 사면 남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광고’한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심을 곧바로 보여 주지 말고 뭔가를 꾸미고 포장하라고 가르친다. 상품이 그 자체로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어려우니 광고가 필요한 것처럼, 남자를 얻기 위해서도 자신의 사용가치를 부풀리는 광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꾀죄죄했던 보나는 닥터 스왈스키의 가르침에 따라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말씨도 여성적이고 귀염성 있게 바꾸었다.

광고가 상품을 물신화物神化한다면, 닥터 스왈스키의 ‘남자사용설명서’는 연애 자체를 물신화한다. 마르크스는 사람이 만들어낸 상품이나 화폐가 오히려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이 그것들을 신처럼 숭배하는 것이 물신숭배라고 했다. 보나는 예쁘게 꾸며 자신의 사용가치를 높임으로써 연애라는 교환가치를 성립시킨다. 하지만 그 연애는 마음(기의)을 보기 전에 이미지(기표)를 본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이, 이미지에 사로잡힌 연애는 이미 물신의 경지에 이른 상태이다. 이는 연애를 위한 상품의 미적 가공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계발,
잉여가 속물이 되는 방법

영화 <남자사용설명서>는 일부러 비디오테이프라는 유치하고 저속한 키치를 선택한다.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비디오테이프는 그 자체로 잉여다. 그리고 언제나 잉여였던 보나에게 ‘잉여로운’ 비디오테이프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실현해 줄 구세주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연애뿐 아니라 지위 상승의 기회까지 제공한다. 자기계발, 자기경영의 화신인 닥터 스왈스키는 보나에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세상의 주인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마치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의 주체가 되라는 이 시대의 전언과도 같다. 보나는 자기계발의 의지를 불태우며 가꿔진 외모를 상품으로 새로운 광고 감독이라는 지위 상승을 꾀한다.

보나는 이제 ‘잉여로운’ 삶을 벗어나 속물이 되고자 한다. 이런 그녀의 태도는 키치적이다. 원래 키치가 전통적 엘리트를 선망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어설프게 그들을 모방해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한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키치는 자기기만이다. 이런 자기기만은 결국 자기소외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나는 일개 신인 배우에서 일약 스타가 된 승재를 부러워하며 성공을 선망했다. 하지만 닥터 스왈스키의 포로인 그녀가 이룬 성공은 환각이었다. 자신을 감독으로 고용한 광고회사 대표는 단지 ‘혜성 같이 나타난 여성 감독’이라는 보나의 캐릭터를 이용해 먹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탄식어린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보다 더 상품화된 관계, 이보다 더 물신화된 현상, 이보다 더 키치적인 태도를 찾을 수 있을까?” (26쪽)

이 논문을 통해 연애가 자기계발과 스펙의 척도가 되고 키치 감수성으로 속물적인 가치가 팽배해지는 시대의 한 단면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다만, 기존의 짧은 평론을 논문 형식으로 대폭 확장한 글이라 그런지 내용의 치밀성이 조금은 떨어졌고 개념과 분석 틀을 적용하는 방식에서 산만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자가 밝히듯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키치와 상품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조망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박일귀 리뷰어  pik1016@naver.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글항아리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1층  |  대표전화 : 031)955-8898  |  팩스 : 031)955-2557
등록번호 : 경기, 아51383   |  등록일 : 2016.05.13   |  발행인 : 강성민  |  편집인 : 강성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현민
Copyright © 2021 리뷰 아카이브.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