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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형상화되는 ‘예술의 비참’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에 대한 어느 서평
강성민 리뷰위원 | 승인 2016.03.15 02:19
<예술인간의 탄생: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감성혁명과 예술진화의 역량>(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가끔 글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읽을 때가 있다. 마지막 한 문단을 읽고 그 위의 문단으로 옮겨간다. 다시 그 위로 계속 타고 올라가서 글의 첫 문단을 읽고 종료한다. 글쓴이의 의도를 존중해서 처음부터 읽는 게 예의겠지만, 거꾸로 읽기가 갖는 나름의 맛과 효율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버릇처럼 간혹 해보곤 한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에 대한 서평 「‘예술인간’의 죽음」(이종찬, 『플랫폼』, 2015년 7월)도 그렇게 읽게 되었다. 제목에 끌렸지만 역시 제목이 주는 부담 때문에 꼬랑지부터 올라탄 것이다. 그런데 이 서평은 약간의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거꾸로 읽기’에 플래시백 효과까지 동반시키는 의외의 짜릿함이 있다. 웬 서평 하나 가지고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거꾸로 읽었으니 리뷰도 거꾸로 한 번 해보자. 마지막 문단을 통째로 인용해보겠다.

“연극인 김운하 씨의 부고 소식을 접한 뒤 그때까지 써둔 이 글의 초고를 미련 없이 지우고 다시 썼다. 기왕에 써둔 글이 아무리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텍스트 안에 너무 갇혀있지 않은가 하는 심정적 이유 때문이었다. 김운하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쩔 수 없이 2011년의 최고은 씨를 떠올리게 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을 논하기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예술인간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32~33쪽)

우울한 내용이다. 생활고에 눌린 예술가들의 연이은 죽음이 언급되고 있다. 때마침 서평자가 고시원 방에서 죽은 지 5일 만에 발견된 연극인 김운하 씨의 부고를 접했던 모양이다. 이미 써둔 서평의 초고가 있었으나 싹 지우고 다시 썼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서평이 ‘텍스트 비평’을 포기하고 ‘실존적 읽기’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 위의 문단은 미국의 한 포토그래퍼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은 살아생전 철저한 무명의 사진작가였던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다. 서평자는 그녀를 카프카와 비교한다.

“그녀의 경우는 아무래도 카프카의 경우처럼 의식적으로 발표를 금기시했다기보다는 생활에 치어 그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거나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존재와 그녀의 작품들을 발굴한 다큐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의 감독 존 말루프가 비비안의 어마어마한 양의 미공개 필름 컷들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비비안이 보관창고 비용을 체불해 자료들이 헐값에 경매에 부쳐졌기 때문이었다.” (32쪽)

비비안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잠시 부언하자면, 그녀는 40년간 보모와 가정부로 살다간 이름 없는 여인이었다. 언제나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거리에 나가 사진을 찍었지만 현상할 형편이 못 되어 필름채로 보관했다. 그러던 2007년 경매로 나온 필름박스를 단돈 400달러에 사들인 역사가가 있었다. 사진을 현상한 그는 사진의 범상치 않은 예술성에 놀라 SNS에 올렸고 이 무명의 사진가에게 매료된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세를 탄 그녀의 사진은 미국, 영국, 덴마크 등을 순회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로 천재 포토그래퍼로 재탄생한 비비안 마이어의 삶이다.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자기 자신을 찍은 많은 사진' 중 하나.

서평자는 여기에 딴지를 건다. 자신의 사진들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큰 주목을 받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 비비안이 살아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며 말이다. 사는 동안 어떠한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했고, 노후에도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이 아끼던 자료를 모조리 압수당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인간. 이 엄중한 사실을 앞에 두고,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은채 그녀의 이야기를 유사 ‘성공 스토리’로 변주하려는 일련의 안이한 태도가 불편하다고 말이다.

이제 감이 오기 시작한다. ‘예술인간’을 다룬 책을 서평하며 필자는 그 ‘예술인간’의 비참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결론을 이끌어간 것이었다.

다시 그 위의 문단으로 올라가면 카프카의 유언을 예시하며 “한 개인의 내밀한 흔적들을 공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점이 강조된다. 왜 그걸 강조할까? 카프카라는 작가에 의해 작품이 발표되는 것과, 그가 죽고난 뒤 제3자가 그의 의도에 반하여 작품을 공개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을 ‘예술적 자아의 수행과정’으로 보느냐 ‘결과물’로 보느냐 하는 오늘날의 대립적 인식 구도와 직결된다.

이제 역주행도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서평자는 예술의 ‘최종 결과물’만 중시하는 풍토를 비판한다. 어떤 분야든 결과물만 중시해선 안되겠지만, 특히나 예술은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훨씬 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오브제화/대상화의 경향은 작품을 예술가에게서 떼어내 소외시키고, 창작 과정에서의 예술적 행위가 갖는 아우라를 다 걷어내고 있다는 게 서평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짧은 서평에서 책 내용은 나오지 않고 계속 칼럼조로 흘러가는 것이 이상하다. 참고로 이 서평은 3페이지 분량으로 신문서평보다는 길고 학술지 서평보다는 많이 짧다. 도대체 책 이야기는 언제 나오는 걸까. 바로 그 위의 문단에서 나오는데, 서평자는 저자 조정환이 ‘예술가’와 ‘예술인간’을 철저히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볼 지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예술가artist’가 아니라 ‘예술인간homo artis’을 옹호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격과 특권을 가진 전문적 직업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예술인간’은 ‘자격 특수적이기보다 보편적이며, 특권적이기보다 특이하고, 직업적이기보다 자기 수행적인 인간형상’으로, 그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누구나’의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30쪽)

서평에서 유일하게 거론되는 책의 내용이다. 말인즉, 지금은 ‘너도나도 예술가‘의 시대다. 예술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게다가 자격으로서의 예술이 범람해 내용으로서의 예술이 살아 숨쉬지 못하는 현상이 더해진다. 이런 상황을 맞아 저자는 예술가에게서 '가'를 떼어내고 '인간'울 붙여준다. 그럴 때 예술'하는' 인간이라는 주체성이 오롯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땐 다소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았다. 말이야 맞지만 익숙하게 지적되어온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이 서평의 첫 문단이자, 읽는 과정으로 볼 때는 마지막 문단에서 서평자는 놀랍게도 전날 있었던 한 술자리를 묘사하고 있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의 시인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제법 유명한 사람이라 ‘시인’으로 호명됐고, 다른 한 명은 덜 유명한 혹은 무명의 시인이라 ‘시인’으로 언급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어라? 그런데 이게 뭐지? 또 반전이 있다. 다시 읽어보니 전날의 술자리가 아니라, 서평자는 글을 쓰는 현재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한다. 서평의 맨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신춘문예의 시와 평론 부문에서 각각 등단한 이력을 가진 어느 선배와 나는 지금 술자리를 갖고 있다. 건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선배의 한 지인이……” (29~30쪽)

그렇다. 이렇게 추측해본다. 서평자는 원고마감을 앞두고 술을 마셨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명함이 묘한 권력효과를 발휘하는 술자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 전 텍스트비평 형식으로 쓴 서평을 떠올린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그것을 고쳐 쓰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명료하게 제유해보려는 욕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평자는 조정환의 책이 ‘시인’의 후광을 드리우고 다니는 ‘예술가’와 시인이지만 후광이 없어 그저 ‘예술하는 인간’일뿐인 ‘예술인간’을 구별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 이유로 책이 제시하는 근거들은 다소 거창하다. “경제인간 속에 잠재하고 있는 예술인간을 드러내는 발견적 술어” “우주와 개체적 자기의 합치를 추구했던 오래된 마술인간을, 새로운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그리고 어떤 특권도 허용치 않는 보편인간, 즉 ‘누구나’의 주체성으로 불러내고 갱신하고 구축”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서평자는 이 미로로 들어갔던 자신을 반성하고 빠져나와 글을 새로 쓰기 시작한다.

새로 쓴 글엔 “근거 없는 자부심이 아니라,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존재하다가 떠난 카뮈라는 '예술인간'이 잠시 언급됐다가,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버리라고 했던 카프카가 호출되고, 급기야 죽어서 유명해진 가난한 예술가, 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있는 예술인간들의 속절없이 가난한 현실이 덩굴처럼 달려나온다. 그런 다음에 최종 결론을 낸다.

“예술인간의 ‘탄생’을 논하기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예술인간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33쪽)

서평의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했다. 탄생을 논하기엔 가혹하다는 말. 비록 텍스트 비평은 생략됐지만 여기엔 그것을 ‘수행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예술인간의 탄생은 바로 ‘죽음’이라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튼튼하게 거느리고 있어야 했다는 말로 들린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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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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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자 2016-03-18 03:12:38

    독특한 독법이 눈에 띈다.
    거꾸로 읽는 즐거움이 있다니... 허를 찔린 느낌.
    어쨌거나 맥없이 쪼그라든, 혹은 명멸하는 주변의 예술인간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다 선량한 건 아니다. 고집 세고, 치사하고, 밴댕이 소갈딱지들이 더 많다.
    그래도 그들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죽어줘야 할 인간들은 따로 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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