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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격려하는 ‘모럴’ 같은 것”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현실 참여로 돌아섰나
김민철 리뷰어 | 승인 2016.03.06 11:30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원서 및 한국어판 초판과 개정판의 표지. 한국어판 개정판의 표지는 좀 뜨악한 감이 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등단 40주년을 3년 앞두고 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郡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그는 1982년 첫 장편 『양을 둘러싼 모험』을 발표해 제4회 노마野間 문예신인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로 1980년대는 하루키의 시대였다. 이는 『상실의 시대』(1987)로 정점을 찍었다. 하루키 스타일에 독자들이 익숙해질 무렵, 즉 “상실감을 느끼면서 타인과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사는 현대 젊은이들의 혼란을 그리고 있는” 그의 소설이 주는 새로움과 공감의 힘이 옅어질 무렵인 2006년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로 다시 작품의 임팩트를 회복했고, 2009년 『1Q84』를 통해 그 임팩트를 1980년대의 전성기를 훨씬 뛰어넘는 강도로 재구축했다. 『1Q84』 이후 하루키는 노벨상을 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작가가 되었다.

 

하루키 내면에 균열이 일어난
1995년

사린가스 피해자를 인터뷰하여 쓴 <언더그라운드>와 피의자인 옴진리교 관계자들을 인터뷰하여 쓴 <약속된 장소에서> 한국어판.

1992년 『양을 둘러싼 모험』을 시작으로 하루키를 따라 읽어온 나로서는 이 독특한 거장의 내면에 일어난 어떤 균열을 느낀 바 있었다. 1997년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살포 피해자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낸 르포 『언더그라운드』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다.(한국에는 2010년에야 번역되어 나왔다.) 이건 기존의 하루키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에 어떤 희망감이 생겨났다. 내 안에서 이미 ‘다른’ 하루키를 원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하루키는 이렇다 할 소설을 계속 써내지 못했고, 나의 하루키 따라읽기도 자연스레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작품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에 나온 연작단편집인데, 한국에도 곧바로 번역되었으나 읽지 못했다. 이번에 우연히 박유미 충남대 강사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UFO가 구시로에 내려오다」론」(『일어일문학』 68, 2015년 11월)을 접하며 이 책이 하루키에게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단편집은 잡지 『신초新潮』에 「지진 이후에地震のあとで」라는 제목으로 1999년 8월부터 12월에 걸쳐 연재된 다섯 편에 새로이 한편을 더해 출간되었다. 필자는 논문에서 “하루키는 데뷔 이래 사회문제에 대해 회피적인 ‘디태치먼트’적인 경향을 견지하면서 일본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작가”인데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과 3월의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계기로 사회와 소통하는 ‘커미트먼트’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영업사원의 결혼생활 파탄과
불안의 엄습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필자가 분석하는 작품은 소설집의 첫 번째에 실린 「UFO가 구시로에 내려오다」로 제목만 봐서는 얼핏 환상소설 같기도 한데 그렇지는 않다. 주인공 고무라는 전자제품을 파는 31세의 영업사원이다. 아내와 둘이서 행복하게 사는 지극히 평범한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아내는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는 고베대지진이 일어나 텔레비전에 지진 피해 및 구조 영상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밥도 먹지 않고 하루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재난특별방송을 시청하던 아내가 닷새째 되던 날 돌연히 가출한 후 그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고무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내와의 생활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큰 키의 날씬한 체격에 옷도 잘 입고 붙임성도 좋은” 그는 20대 중반까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결혼 후에는 가정에 충실했다. 몇 번 기회가 왔지만 바람도 피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했다. 그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그의 아내는 외모가 투박했다. 아니 못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가 그녀와 결혼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일이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둘이서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 섹스를 하는” 생활이 흡족했다. 아내는 그에게 이혼의 이유를 밝히는 메모를 남겼다.

“문제는 당신이 내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당신 안에는 내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부드럽고 친절하며 핸섬하나 당신과의 생활은 공기덩어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논문 245쪽)

고무라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가 아내와의 관계에서 얻고자 한 것과 아내가 남편인 고무라에게 바랐던 것이 서로 달랐다. 당혹한 고무라는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지만 잘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무라는 – 그 이유는 본인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 한 지붕 아래에 아내와 둘이 있으면 긴장이 풀리고 편하고 느긋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밤에는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기묘한 꿈에 시달려 잠을 설치는 일도 없어졌다. 단단하게 발기 되고 섹스는 친밀했다. 죽음이나 성병이나 광활한 우주에 대해 걱정하는 일도 없어졌다.” (245쪽)

 

편안한 관능이라는 것은
현실에 없다?

필자는 고무라가 아내에게 느낀 ‘관능’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성적인 긴장감을 동반한 통상적인 남녀관계에서의 관능이 아니었다. 어쩌면 고무라는 편안함과 친밀함 속에서 자기만의 관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내는 고무라에게서 어떤 관능을 느끼지 못했다. “내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아내의 말은 그와의 관계가 남녀관계에 있어서의 관능적이며 에로스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전반부다. 이후 아내와 이혼한 고무라는 휴가를 받았다. 그때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동생에게 작은 상자를 전하기 위해 홋카이도의 구시로로 향한다. 여기서 고무라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갖는다. 친구의 동생과 공항으로 마중나온 시마오라는 여성이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결합을 시도했으나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아서 고무라는 포기했다.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인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하고 시마오가 물었다.
‘응’ 하고 고무라는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건 지진의 광경이었다. 그 광경이 슬라이드 영상처럼 한 장면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길 반복했다.
(…) 그는 그 소리 없이 이어지는 이미지들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247쪽)

이제야 작품의 상징구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마오는 아내와는 달리 고무라에게 지진과 같은 걱정들을 상기시키고 현실화시키는 여성이었다. 시마오는 모자관계와 같은 편안함과 관능이 결합되어 있는 고무라와는 상극과 같은 인물로 위험과 관능이 공존하는 여성이었다. 고무라가 묶게 된 러브호텔은 묘석을 만드는 석재상과 러브호텔이 교대로 늘어서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는 묘석이 나타내는 ‘죽음’과 러브호텔이 나타내는 ‘관능’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곳으로, 시마오의 이미지와 겹치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하루키 자신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루키가 대학에 들어간 1968년에는 학원 분쟁이 한창이었다. 데모로 학교가 폐쇄되는 가운데 하루키는 영화와 재즈 클럽을 드나들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는 고쿠분지國分寺의 센다가야에서 재즈음악다방 피터 캣을 경영하기도 했다. 현실과 담을 쌓고 그의 작품세계는 발전되어 나갔다. 그러다가 고베대지진과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를 만났다. 게다가 1995년 버블경제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미쓰비시상사에 들어가면 평생 안주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 삶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고무라의 아내가 들여다보았던 지진 영상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 붕괴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현실과 무관한 소설을 썼던 하루키의 모습은 아내의 내면적 삶을 외면하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그만의 편안함을 누려온 고무라의 결혼생활과 무척 닮아 있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설정해놓은 것이라는 심증이 강하다.

“‘어때, 멀리까지 왔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나?’
‘꽤나 먼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야.’ 하고 고무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마오는 고무라의 가슴 위에다 손가락 끝으로 무슨 주문처럼 복잡한 무늬를 그렸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247~248쪽)

성관계에 실패한 뒤 고무라와 시마오가 나눈 대화다. ‘안온함’을 벗어나 ‘지진’이라는 현실 안에 들어선 고무라는 “꽤나 먼 곳에 온 것”처럼 느꼈지만, 시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지금 고무라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앞으로 맞닥뜨릴 그것에 비하면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95년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삶의 ‘알맹이’는 아주 멀리 있지만
이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루키는 고도경제성장을 위해 달려온 일본이라는 사회시스템 자체의 문제이자 일본인의 정신적 가치의 황폐를 말해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본고에서 이 소설이 지진과 버블경제의 붕괴를 함께 얘기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250~251쪽)

필자의 말이다. 소설의 도입부에 버블경제의 호경기가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도 바로 작가의 이러한 관점 때문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1995년은 고베 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이 일어난 해이지만, 버블경제 붕괴의 고통이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상태다. “경제학적 현상으로서의 버블붕괴와 이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체감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적 낙차가 존재”한다. 1995년은 아직 일반인들이 불황을 피부로 느끼기엔 이른 시기였다. 그래서 “아주 먼 곳에 온 것 같은” 느낌만 증폭되는 시기다. “전국적으로 땅값 하락이 명확해지고 기업의 업적 악화로 신규졸업자에 대한 구인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한편 대규모금융기관이 잇따라 파산을 맞이하는 1996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키는 바로 이것을 작품 마지막의 복선으로 깔고 있다.

이러한 의도가 파악된 이상 작품의 구조는 명확해진다. 작품이 발표된 당시 일본의 평단에서는 지진이나 재해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을 회피하고 이를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일었다. 후쿠다 가즈야는 “천재天災라는 자연의 타자성은 완전히 기각되고 모두 내면화되고 있다”라고 비판했고, 오쓰카 에지는 “무라카미는 천재인 고베지진과 사린사건을 동열에 놓고 문제를 위기관리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축소화시켜 다른 한편의 ‘폭력’의 주체인 옴=아사하라麻原의 존재를 제거해버리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물론 하루키가 옴진리교 사건의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를 인터뷰해서 2권으로 내놓은 『언더그라운드』 시리즈가 나오기 전의 일이다. 아무튼 하루키가 작품에서 그러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논문의 마지막에서 필자는 하루키의 의도와 자신의 해석을 합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비교적 분명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설득력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UFO가 구시로에 내려오다」라는 소설은 이처럼 작품의 기저에 불안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무라가 자신이 잃어버린 ‘알맹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키가 “버블경제가 붕괴된 것이 일본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했듯이 버블경제의 붕괴나 재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부패한 시스템을 제로화시켜 보다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새로운 출발일 수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가치를 찾아 조용히 일어나야 하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며 ‘거기에는 우리들을 따뜻하게 격려하는 ‘모럴’과 같은 것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 하루키의 집필의도를 통해서도 이러한 면을 읽을 수 있다.” (252~253쪽)

김민철 리뷰어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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