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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의 서사와 내셔널리즘해방전후 우장춘 서사의 과학 담론을 중심으로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8.04.10 14:30

‘씨없는 수박’의 과학자, ‘마술적 육종학자’로 잘 알려진 우장춘 신화는 교과서 및 여러 전기들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정종현은 그의 논문 과학과 내셔널리즘- '해방전후' 과학() 이동과 우장춘 서사의 과학 담론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 39, 2013)에서 “우장춘이라는 문제적 과학자의 행장과 재현서사를 통해 과학(자)과 내셔널리즘, 과학과 정치, 과학(자)의 사회적 소비 양상 등을 검토”한다.(215쪽) 우장춘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제국 일본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혼혈인 조선 과학자였지만 “일본을‘버리고’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한국전쟁의 척박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농업의 기틀을 마련하다가 순사하면서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과학자로 서사화되면서 과학 내셔널리즘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215쪽) 본 논문은 우장춘 신화의 진실을 포함하여 우장춘 신화 만들기가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러한 검토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소위 위대하다 평가되는 한국의 과학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 기대한다.

<그림1>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왼쪽부터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대한민국의 주체적 농업과학?:
제국 과학의 연속성

우장춘은 개화파 무인으로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암살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원래 공학부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농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겹피튜니아 합성에 성공하고 ‘종의 합성’에 관한 논문으로 동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해방 전까지 다키이종묘주식회사에서 농장장으로 근무한다. 그러나 해방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우장춘은 한국으로 귀환하여 무, 배추, 벼 등의 개량종 연구를 통해 한국 농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우장춘의 한국에서의 연구는 상당 부분 일본에서 수행한 연구 내용과 경험에 기대어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수행된 우장춘의 과학 연구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과학을 이념으로 하는 일본 과학의 교육과 프로그램에서 교육 받은 결과물의 연장선인 셈이다. 일본에서 개발한 일본무와 배추 등의 개량종 지식을 한국에 와서는 무와 배추 등에 적용시켰고, 실험실 연구 문화 역시 일본에서 체화한 상태로 한국에서 이어갔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농업 진흥에 대한 우장춘의 구체적인 계획 역시 식민지 시기 일제 조선총독부의 수요 하에 진행된 결과물인 점이다. 1943년 전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던 일본은 식량은 무기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종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였다. 이 때 우장춘이 일했던 다키이종묘주식회사는 ‘전시 아래 식량 증산에 매진하는 총후의 진지한 모습을 엿보자는’ 목적을 위해 조선에서 농산품 품평회를 개최하였고, 우장춘 역시 조선의 농지를 돌아보고 연구 계획을 수립하는 데 역할하였다. 또한 우장춘은 총독부의 요청으로 한국인 김종을 육종 전문가로 추천하였는데 김종은 해방 후 우장춘을 한국으로 초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접하고 연구한 우장춘의 경험은 이후 한국에서의 연구 행보에 중요한 기틀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2> 조선다키이종묘회사가 주최하고 조선농회, 사단법인조선흥농회, 매 일신보사, 경성일보사가 후원한 ‘全鮮蔬菜果實大品評會’ 광고 (출처: 『매일신보』 1943년 10월 19일)


“우장춘은 총독부의 관비유학생으로 도쿄제대 농학부 실과를 마칠 수 있었는데, 국가의 장학금을 통해 습득한 과학지식을 다시 국가에 환원하고 있는 셈이다. 우장춘은 조선을 목적의식적으로 방문했으며, 또한 이러한 방문이 조선의 농업적 현실에 대한 그의 이해와 1950년의 귀국에 영향을 끼쳤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220쪽)

 

특히나,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종자에만 의지하던 조선의 농업을 일본의 과학지식에서 독립시키고자 조선의 육종 기술에 매진하던 우장춘의 연구 역시 일본에서 수행한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농사 시험장에서 농장장으로 일할 당시 우장춘은 수입하는 ‘지유 원료’의 전량 국산화를 목표로 품종 개량 연구를 수행하는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 외국산 종자를 국산화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을 했던 과학자였다. 즉, “우장춘의 제국 농학의 경험은 대한민국의 주체적인 농업과학의 수립으로부터 이어진다.”(222쪽)

 

우장춘은
한국으로 돌아왔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학문 활동의 기반을 포함하여 가족들마저 모두 일본에 있던 우장춘이 해방 후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장춘 재현에 대한 대부분의 서사는 “일본에서의 차별의 설움과 자신의 아버지 나라에 헌신하고자 하는 애국적 사명감”을 그 동기로 설명한다.(223쪽) 그러나 논문의 저자는 우장춘의 귀국을 단순한 조국에 헌신한다는 ‘애국주의’나, 과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과학적 휴머니즘’ 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저자는 20세기 이후 한국 과학자들이 그들이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국가, 자본)을 찾아 떠났듯 우장춘의 한국행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장춘은 1945년 일본 패전 직전에 다키이종묘주식회사를 그만두고 교토의 한 사찰에서 개인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는데, 이 때 한국에서 추진된 우장춘 ‘환국준비위원회’의 적극적인 영입 의지가 우장춘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한국은 그가 이미 식민지 시기 어느 정도 경험이 있던 지역이자, “과학적 포부를 펼칠 수 있는 육종학의 ‘처녀지’였으며 ‘아버지의 나라’라는 연고지”라는 장소로, 그가 한국행을 택하는데는 여러 요소가 적절하게 작용했다고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224쪽)

 

해방 전후 
우장춘 귀환의 민족서사 비교

대중 속에 퍼진 우장춘의 서사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암살당한 개화파 무인 아버지, 일본인 어머니와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동경제대에서 수학하며 우수한 연구 성과를 냈지만 한국인 국적을 가졌다 차별 받는 ‘자이니치’, 가족을 모두 일본에 두고 한국으로 와서 한국 육종 발전에 헌신한 생애는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저자는 논문에서 대표적으로 이남희의 장편소설 <그 남자의 아들, 청년 우장춘>에서 묘사되는 우장춘을 분석하며 이 서사가 ‘우범선-우장춘’ 부자를 “역사의 비극적 희생양지미나 그 난관을 극복하고 민족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민족주의적 주체”그려냈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서 우장춘은 그의 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번민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논문의 저자는 실제로 우장춘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언론 지면에서 이를 다루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남희 소설에는 “해방 이후 반일감정의 핵심코드로 정서화된 ‘명성황후’에 대한 고정된 인식이 깔려있”었다고 평가한다.(228쪽) 오히려 명성황후와 구한말의 개화파에 대한 평가가 다소 복잡했던 식민지 시기 언론이 우장춘을 다룬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세계와 일본 내에서 인정받고 있는 ‘조선인’ 과학자 우장춘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인 아버지 우범순이 드러나고, 일본인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숨겨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하나, 식민지 시기에 묘사된 우장춘의 유년기 서사에서는 민족적 차별 대신 “기아와 궁핍을 극복한 고학의 서사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식민지 저널리즘에 드러난 이러한 특징은 우장춘이 한국으로 귀환한 1950년대에 와서는 다른 특징으로 변모한다. 우선,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에 대한 인식이 ‘을미사변’의 연루자 또는 역적의 모습이 아닌 “구한말 개화파 ‘혁명지사’”로 변화하는 점이다. 또한 조선에 적을 둔 부계 혈연을 강조하는 내용이 한층 더 강화되며 우장춘의 ‘민족적 귀속’을 재차 강조한다.
 

“우범선이라는 혁명지사의 방랑의 길에 우연히 “왜인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난 우장춘이 일본인의 차별을 받으며 자신을 망국의 국민으로 자각하고 민족적 복수를 염원하며 (영웅)로 입신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는 서사, 이것이 과학자 우장춘의 민족으로의 귀환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34-244쪽)

 

여기에 우장춘은 동양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학자로 추앙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세계육종학계가 미국/소련/동양이라는 3개의 지도로 분할되어 우장춘이 동양의 대표로 내세워지는데, 이 방식이 “냉전의 세계 심상지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고 분석한다. 

 

씨없는 수박
전략적 활용

이렇듯 한국으로 귀환한 우장춘의 행보와 업적은 정부와 언론의 지지를 얻으며 민족주의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씨없는 수박’을 적극 활용하여 육종학 연구에 필요한 국가의 지원과 무지한 농민 대중의 계몽 효과를 고루 얻어낸 우장춘을 두고 “자신의 지원을 위해서 정치의 지원을 끌어낼 줄 아는 인물”이었다 평가한다. 더불어 우리 사회 역시 우장춘의 ‘씨없는 수박’ 사례를 한국 과학기술의 ‘국가신화’로 격상시키며 오늘날까지도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앎 그 자체를 위해 거의 모든 대가를 무릅쓰고 끊임없이 애타게 앎을 추구하는 찬란한 천재’로서의 과학자, 영감과 창조력이 충만한 천재(시인)와 유사한 과학자의 형상이 낭만주의 세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리처드 홈스의 <경이의 시대>의 통찰을 빌자면, 한국의 근대 과학자의 형상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자 형상과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244쪽)

 

시대가 변화하며 영웅의 서사의 전개 역시 변화를 보인다. 저자는 한국에서 근대 과학자의 재현 서사에 복잡하게 얽힌 “식민, 제국, 민족의 자기 욕망” 등의 요소를 다층적으로 검토하며 과학자 주체에 대한 논의를 확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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