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2012~ 정치/사회
누구를 위한 철도였나?근대화의 상징 뒤에 숨겨진 일제의 수탈과 지배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8.04.10 14:32

근대화의 상징, 철도:
억압과 공포의 대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사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철도’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선진국에서 철도는 “국민경제의 형성과 국민국가 수립의 지렛대”로 활용되며 사회 여러 분야의 전방위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재정은 근대로 열린 철도」 (『역사비평』 2, 2005) 논문에서 선진국에서 근대화의 상징으로 흔히 알려진 ‘철도’가 실상 한국에서는 일제가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서” 만들었고 사용했던 식민지의 산물이었음을 주장한다. 저자가 철도가 한국 사회에 제공한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철도가 가진 식민지적 성격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국 철도의 역할과 사명은 선진 여러 나라와 무척 달랐다. 한국 철도는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이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첨병 구실을 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철도는 일제의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서, 또한 일본이 제국주의 세력을 아시아대륙으로 뻗게 하는 동맹으로 기능했다.” (222-223쪽)

 

한국 철도 역사의 시작:
시기별로 다른 목적

1899년 9월 18일, 같은 동아시아권 내에서도 상당히 늦은 시기에 한국에도 일제의 주도 아래 철도가 건설되었다. 이때부터 경부선과 경의선을 시작으로 호남선과 경원선 등이 줄지어 건설되며 한국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저자는 이를 총 5기로 분류한다.

 

우선, 제1기(1899-1906)에 건설된 경부선과 경의선은 “한국의 정치적 중심도시와 경제적 선진 지역을 관통하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최대한의 병력과 물자를 만주에 집결시킬 수 있는 노선”으로, 일본과 한국 그리고 만주를 최단거리로 잇는 경로였다. 이처럼 군사적 목적이 다분했던 제1기에 이어 제2기(1906-1917)에 건설된 호남선과 경원선은 “한반도의 곡창지대를 서남에서 동북으로 종관하는 새로운 간선철도”이고, 이 시기는 일제가 철도의 수송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제3기(1917-1925)에 와서는 “한반도 동북지방을 종단하여 만주에 접속하는 간선철도로서 함경선이 부분적으로 개통”되었다.(226쪽)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한국과 만주의 일원적 지배를 촉진”하고자 한국 철도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 경영했으나,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지출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계속 생기자 다시 철도경영권을 가져온다. 저자가 “일본이 식민지로서 독자성이 강화된 한국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개발과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철도망을 확장한 시기”로 평가하는 제4기(1925-1937)에는 그 목적에 걸맞게 도문선, 전라선, 혜산선, 만포선 등이 다량 건설되었다. 이 노선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인구 이주와 식량과 연료를 일본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곡물생산과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지나도록 설계되었다. 마지막으로 제5기(1937-1945)에 만들어진 철도는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다시 일본과 만주를 최단거리로 만들어진 노선으로 경경선(지금의 중앙선)이 그 사례이고 기존의 경부선, 경의선 등이 개량되었다.

 

<그림1> 한반도와 만주의 간선철도 (1944년 현재)

 

저자는 한국 철도가 “식민지적 기형성”을 가지고 있다 주장한다.(228쪽)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 철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주요 철도 노선이 모두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로서, 일본으로 물자를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30 전과 :
무엇을어디로 실어날랐나

철도가 건설된 후 그 영향력을 더 잘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철도가 무엇을 어디로 실어 날랐는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저자는 1930년을 기점으로 철도의 화물 수송이 급증한 데 주목한다. 그 이전까지는 제1차 세계대전(1915-1923)이나 세계 경제공황기(1928-1932)라는 특수한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여객수입과 화물수입이 균형을 맞추며 평이한 이용률을 보였다. 그러나 적자폭이 컸던 전기와 다르게 1930년이 지나면 급증하는 수요와 더불어 철도 수입으로 인한 이익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철도로 수송한 화물 내용물 역시 1930년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를 맞았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이 1930년대 중반을 경계로 식량수탈 제일주의에서 자원수탈과 군수공업화 우선주의로 전환”되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그 증거로 과거 농산품(쌀, 조 등)과 광산품(석탄)이 각각 22-32%, 17-28%로 전체 수송품의 절반을 차지하였다면 1930년 중반 이후부터는 광산품이 32-38로 증가하고 그 뒤를 공산품이 이었다. 광산품과 공산품의 종류도 이전에 석탄에 편중되어 있던 것과 다르게 석탄, 시멘트, 철광석, 금속, 기계, 군수품 등으로 다양해졌다.

 

“요컨대 한국의 간선철도는 한국과 만주의 원료 및 곡물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일본의 공업 제품과 군대 및 이민을 한국과 만주로 운반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231쪽)

 

한편 1930년대 이전까지는 당시 주요 운반물이었던 쌀과 조, 석탄을 운반한 남행 열차와 운송품이 많지 않았던 북행 열차 간의 이용률 격차가 심하고, 농산물의 특성상 계절별로 운행 편차가 생기는 문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1930년부터는 중일전쟁의 확대와 만주로의 이동 역시 급증하며 앞선 문제들이 대부분 해소되고 철도 운영이 막대한 흑자를 내는 산업으로 전환하였다.

 

 

 

 경부선이었나?

경로 선정 뒤에 숨겨진 일제의 침략과 지배

당연하지만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투입되는 철도 건설은 노선 선정부터, 철로의 궤간까지 무엇 하나 사소히 넘길 수 있는 사업은 아니었다. 일제 역시 한국에 철도를 세우기 전에 수많은 계획과 조사를 세우고 건설을 추진하였다. 저자는 “한국 철도의 노선이 어디에, 어떻게, 왜 배치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일제의 침략과 지배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노렸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며 경부선을 건설하기 전 일제가 수립한 계획의 일부를 분석하였다.(232)

 

“일본은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국방공위(國防共衛) 경제공통(經濟共通)”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말인즉, 철도를 매개로 하여 한국과 일본이 군사적-경제적으로 공존공영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철도 부설과 운영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일본이 철도를 장악하여 한국을 군사적-경제적으로 한꺼번에 침략하고 지배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232쪽)

 

일본은 경부선 노선을 세우기로 한 직후 1892년 8월 제1차 답사를 시작으로 1903년 3월까지 약 10년 동안 노선을 결정하기 위해 총 5차의 답사를 진행하였다. 애초의 목표에 걸맞게 군사와 경제를 모두 장악하려 했던 1892년 1차 답사에서는 서울과 부산 사이의 도시를 인구와 경지, 물자 등을 모두 비교 검토하여 경제적 선진지역을 주로 관통하는 노선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중이던 1894년에는 이 노선이 병참 수송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도록 하고 추풍령을 횡단 가능한 영동을 경유하도록 변경하였다. 그러나 자본가의 의지가 반영된 1899년 3차 답사 후 결과는 당시 조선의 유통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장시를 지나는 정거장이 대거 추가되며 경기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평야지대를 모두 지나는 상공업 번창을 위한 노선으로 수정되었다.

 

<그림2> 경부선 노선 선정과정

 

최종적으로 선택된 1903년 5차 답사는 그 이전 4차 답사에서 결정을 못 내렸던 군부가 주도한 북부 직행선이 채택되었다. 이 배경에는 러일전쟁을 앞둔 일제가 러일전쟁의 병참로로 경부선을 이용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일본 군부의 의지는 이후 철도의 넓이인 궤간을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경부선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이 있는 일본은 중국 철도와 동일한 넓이의 표준궤를 선택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중국이 쓰던 표준궤를 선택한 일본의 결정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일본의 것과도 달랐을 뿐 아니라, 일본이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앞두고도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해 자원까지 추가로 수입해야 하는 악조건을 굳이 감수하며 결정한 데에는 일본의 원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경부선은 단순한 식민지 철도가 아니라, 장래 중국 및 유럽대륙의 철도와 연결되어 세계교통의 간선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난(萬難)을 무릅쓰고라도 표준궤를 채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부선을 통해 대륙으로 세력을 뻗치려는 일본 군부와 정치계를 움직였다.”(238쪽)

 

논문에서는 철도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겪은 폭력과 설움 역시 잠시 서술된다. 일반적으로 근대화의 상징으로 각광 받는 철도는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억압과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때문인지 철도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많은 과제로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재정의 논문은 다소 오래 전에 쓰인 논문임에도 오늘날 다시 정리하고 읽어 볼 의미가 충분하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지호 리뷰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1층  |  대표전화 : 031)955-8898  |  팩스 : 031)955-2557
사업자번호 : 141-81-14390   |  등록일 : 2009.02.01   |  발행인 : 강성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성민
Copyright © 2018 리뷰 아카이브.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