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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함은 약자의 감정이자 희망의 증거원통함에 대한 철학적 고찰
김연정 리뷰어 | 승인 2018.02.14 07:5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화병으로 한방병원을 찾은 환자의 80%가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의 4배에 달했다. 또, 지난해 화병으로 지난해 한방병원을 찾은 환자 수는 추석 연휴가 있었던 9월과 10월에 최고치를 달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81053001&code=940601

불평등하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가족관계,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를 참아온 것에서 기인한 통계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설 명절을 앞두고 한이나 화, 원통함 등 여성들이 많이 경험하는 감정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하고 있는 논문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디 마디 설움
원통한 감정

허라금의 「원통한 감정에 관한 철학적 탐색」(『한국여성철학』28, 2017, 한국여성철학회) 은 원통한 감정이 갖는 특징에 주목하고, 원통해하는 이들을 외면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공감으로 이해해야 할 윤리적 책임에 관한 내용을 담은 논문이다. 특히, 통한의 감정이 주로 여성의 서사 혹은 여성과 관련된 감정 분석 속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들의 통한적 감정의 이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는 원통함의 감정적 특징을 일시적인 감정상태 보다는 오랫동안 분함을 해소하지 못해 축적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원망의 감정 상태라는 데서 찾는다. 이는 우리말의 ‘한’에 해당하는 한의 정서와도 이어진다. 저자는 원통함이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 모두에서 나타난다고 보는데, 최근 세월호 침몰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비탄과 애통은 단순한 슬픔과 분노라고 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이는 통한적 감정이다.

“논에 가면 갈이 원수/밭에 가면 바래기 원수/집에 가면 씨누 원수/ 세 원수를 잡아다가/참실로 목을 매어/범든 골에 옇고지나."

“어매 어매 우리 어매/뭘 먹고 날 맹글었나/우리 어매 날 날 적에/ 죽순 나물 먹었던가/마디마디 육천 마디/마디마다 설움이네.” (58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민요에서 볼 수 있듯이 시집살이, 과부의 설움, 노동의 고됨, 남편의 처첩 관계, 시누이올케 사이의 알력 등 한과 관련된 전설이나 민요·속담은 여성들과 관련된 것이 많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한은 주로 여성의 감정으로 여겨지고 있다. 앞의 속담은 한이 자연의 원리를 바꿀 만큼 그 억울함과 분함이 강렬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저자는 여성의 감정으로 취급되는 원통함의 감정이 갖는 인간적, 윤리적 의미가 젠더적 의미틀 속에서 삭제되고, 단지 병리적인 것으로만 간주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원한의 감정이 왜 오랫동안 ‘여성의 감정’으로 간주되어 왔는지, 그것은 어떤 서사 양식의 특징을 갖는지, 그리고 그런 특징은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살펴본다.

 

되풀이,
고통스러웠던 감각을 생생히 기억하려는 의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묶여 있는 원통함은 ‘의로운 분노’ 감정의 적당한 범위를 넘어서 버린 것으로 간주되며, 일종의 피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원통함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자신이 당한 억울함에 관해 앞뒤 불필요할 만큼 상세하게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내 어머니, 친구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수십 번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관심 기울여 인내하며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지겹다,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반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원통함에 사무쳐서 자신이 당한 부당함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은 기질이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탓으로 범주화 된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절대 당신이 나에게 한 짓에 대한 원통함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야말로 원통함을 다른 분노나 슬픔과 구분해 주는 주요 특징의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원통함이 보여주는 이런 특징을 예리하게 관찰한 이는 린 맥팔(Lynne McFall)이다.

“원통함은 용서와 잊기를 거부함이다. 그것은 누군가 행했던 부당함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타인들이 조심스럽게 경청하거나 동정할지도 모를, 상실에 대한 자신의 분노의 탄원(이야기)을 상술하려는 것이다” (66쪽, L. McFall, 「What’s wrong with bitterness?」, 『Feminist Ethics』, 1991, pp. 146~160. 필자 강조.)

원통함의 서사 양식은 자신이 당한 부당함이나 억울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고안해낸 효과적인 방식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자신을 아프게 하는 힘든 일들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도 그때의 아픔 그대로 ‘그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유지’하려는 것은 분명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상이 아니다”, ‘독하다’거나 ‘피학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원통함은
희망의 증거

맥팔은 원통한 감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를 탐색한다. 그녀는 절대 용서하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원통함의 감정이 흔히 그것을 비합리적인, 심지어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관점들과 달리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녀는 원통함의 핵심에는 ‘중한 삶의 희망 상실’이 있음을 통찰한다. 삶의 이유가 되는 희망이 상실된 것에 대한 회한, 분노, 슬픔이 원통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너의 슬픔은 쓸데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흄(David Hume)이 대답한다. ‘맞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슬프다’. 아무 소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비탄이 있다. 아무 소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소용없음 자체가 슬픔의 이유가 되는 합당한 비탄이 있다면, 같은 논리로, 아무에게도 이익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되는 원통함이 있다고 맥팔은 주장한다. 비탄이 사랑의 증거라면, 원통함은 희망의 증거이다. 사랑과 희망 둘 다 잘 이뤄지기도, 잘못 이뤄지기도 한다. 따라서, 비탄과 원통의 감정들은 이들 사랑과 희망을 상실함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73쪽, McFall, 「What’s wrong with bitterness?」, p. 151, 재인용.)

그러나 원통함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빼앗긴 희망이 과연 통한해 할 만한 것이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즉, 정당한 원통함이기 위해 반드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희망이 원통함에 빠질만한 것이었어야 한다. 맥팔의 경우, 어떤 원통함이 이해할만한 것이 되려면, 그 상실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자식의 죽음은 원통해 할 만한 것이지만, 자신이 언젠가 죽어야하는 사실은 원통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희망의 상실 역시 원통해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맥팔은 누군가의 의도적 행위로 인해 인생의 희망을 상실한 경우에 특히 주목한다. 실제로 재난에 의해 상실을 겪은 이들의 경우, 그것이 천재에 의한 경우보다 인재에 의한 것일 때 그 원통함과 트라우마가 훨씬 더 치명적이고 치유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생긴 상실은 체념의 대상이지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할 원통함의 대상은 아니다. 그의 원통함을 구성하는 믿음이 적어도 거짓이 아니라면, 그리고 자신의 아무 잘못도 없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희망을 빼앗겼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원통함이다.

 

말하는 것의 실패와
듣는 것의 실패

저자는 맥팔이 적어도 모든 원통한 감정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였다는 점에서 소극적 논증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의 어떤 원통함이 정당화되는 것인지, 적극적 논증은 아직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누구나 동의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원통함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전제한 맥팔의 입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문제제기를 한다. 그러한 관점은 결국 이 세상에는 정말 원통해 할 만한 일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원통함의 정당화는 통계적인 근거나 보편타당한 논리적인 근거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것은 원통해 하는 자가 그 원통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원통해 하는 이가 ‘상실당한 자신의 희망’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될 만큼 소중한 것이고, 원통함을 구성하고 있는 믿음들이 거짓이 아닐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당사자의 ‘주관적’ 정당화는 아니다.

이제 저자는 원통함에 대한 사회적인 반응에 주목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사회적으로 주어진 부당함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의 감정으로 원통함을 해석하는 것으로 의미의 맥락을 전환한다.

저자는 원통함이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지도 더는 자신의 호소를 들어주지도 않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발화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자 하지만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억울함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용어와 논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어 제대로 말할 수 없기에 수신자 역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고 종래에는 더 듣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화자는 전달되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다시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캠벨 (Sue Campbell)은 말하는 것의 실패, 듣는 것의 실패, 이 두 가지 실패가 원통함을 구성한다고 분석한다. 수신자가 듣기를 거부할수록, 발화자는 자신의 분노에 수신자가 주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게 표현하기를 계속하려 한다.

 

분노는 강자의 감정
원통함은 약자의 감정

저자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애초의 분노가 원통함이 되는 과정은 감정의 사회적인 맥락과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사회적 맥락에서 분노는 강자의 감정이지 약자의 감정이 아니다. 분노한 한다는 것은 분노의 대상 혹은 상대에 대해 내가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즉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안이나 상대를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분노는 상대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못한 약자는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강자의 감정인 분노는 전통적으로 여성이나 노예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규범적으로, 사회적 약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함에 슬퍼해야 할 뿐 분노해서는 안 된다.

“분노한 남성은 ‘남성다운 인간’이지만, 분노한 여성은 ‘감정적인’ ‘천박한’ 더 나쁘게는 ‘히스테리칼’ 한 여성이다. 그녀의 ‘진짜’ 분노는 함께 부정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감정 그 자체의 성질 속에 반영된다. 한 남자는 분노의 에피소드를 의분으로 특징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여성은 그것을 덜 도덕적인 어떤 것으로 느낄 것이다. 예컨대, 죄책감 섞인 좌절, 혹은 슬픔. 이들 차이들에 깔려 있는 젠더 스테레오 타입의 이해는 순전히 인습적인 신비화이며, 그것을 체화한 감정들은 사회적 ‘순응’에 의해 유도된 자기기만적인 감정의 패러다임들이다 .” (80쪽, McFall, 「What’s wrong with bitterness?」p. 154, 재인용; R. de Sousa(1990). 『The Rationality of Emotion』, Mit Press, p. 259.)

나가는 말에서 저자는 원통함을 전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만하라”고 하는 것은 그의 고통은 물론, 그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그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일 권리 조차 박탈해버리는 행위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누군가의 원통함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원통함이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진실을 증언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수 있어야 한다. 원통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기울일 때, 당사자의 한은 점차 해소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저자는 원통한 자의 위치에 서서 함께 고민하지 않고, 단지 용서하고 잊어버리라는 위로는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를 위한 위로라기보다는, 그럴 수 없는 것을 그래야 한다고 그 사람을 채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대해 갖고 있는 통한의 감정이 그들의 현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해야 할 다른 일들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원통함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전달되었을 때 더는 원통함이 지속되지 않으며 그 이후의 감정은 분노라고 한 캠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통함과 분노가 개념적 차원에서처럼 그렇게 감정적으로 분명히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상실한 희망으로 인한 원통함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하되 한이 되어버린 원통함이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갈 수 있기를 함께 바랄 뿐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아쉬움과 함께 희망의 단서를 찾아보게 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허라금, 「위험시 재난과 정치적 책임」, 『철학연구』 108호, 대한철학회, 2015.

 

김연정 리뷰어  equ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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