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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 전차(電車)의 흥망성쇠 (1)운행 도중 타고 내리다 사고 빈번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8.01.23 14:39

전기거라 하는 것이 대한에 처음 생겨남에 아직도 개명 못된 인민의 안목에 어찌 구경스러운 물건이 아니라고야 하리요. 그러한 고로 전기거 내왕하는 데 구경들 하려고 남녀 노소 상하 없이 다투어 타기도 하고 구경도 하는데, 혹 실족도 하고 혹 실수도 하여 경색이 매양 좋지 못하다더니, 어제께 어떤 아이가 또 죽었다는지라. 오전 9시쯤 되어 전기거가 동편에서 올라오는데 인민이 많이 모여 있다가 전기거가 전동 병문 앞 종로에 당도하거늘 인민이 달려들어 그 전기거를 짓부시며 불을 놓아 다 태우면서 하는 말들이 “전기거에 사람이 많이 상하고 죽고 또 날이 오래 가물고 전폐로 가계가 생겨 물가가 고등하여 인민의 정형이 점점 못살 지역이니 어찌 하면 좋을는지. 정부에서는 이런 민정을 좀 살피지 않은지 밤낮 한다는 사업이 무슨 일들인지 공변될 공(公)자는 간 곳 없고 사사로울 사(私)자만 성행하니 그 정부 믿지 않는 백성들은 어떻게 안보하리요.” 하고 답답한 말들을 한다더라. (출전: 『독립신문』 1899년 5월 27일)

1899년에 처음으로 운행을 시작한 서울의 전차는 1968년 숱한 갈등과 이야기를 남기고 철거되기까지 70여 년 동안 서울의 도시교통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이는 통상 마차, 전차, 자동차, 지하철과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세계 도시교통사의 흐름에서 보자면 꽤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차가 도시의 주된 교통기관으로 활약한 시기는 통상 189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인 반면, 서울에서는 1950년대 중엽까지도 전차가 도시교통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도보(~1899), 궤도(1899-1950), 버스(1950~1974), 지하철·자동차(1974~현재) 등으로 변화”한 서울 도시교통의 역사에서 전차는 20세기 전반을 주무른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42쪽) 최인영 박사의 논문, 「서울지역 옛 電車노선도를 활용한 도시교통의 변화」(『한국고지도연구』 7(2), 2015년 12월)는 여러 전차 노선도를 활용하며 서울 지역 전차의 이러한 흥망성쇠를 정리하고 있다.

 

[그림1] 개통 당시 서울 전차의 모습

 

대한제국시기 전차의 도입과
노선 확충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2년 뒤인 1899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서울의 전차는 서대문 인근의 경교(京橋)에서 명성황후의 홍릉에서 가까운 청량리까지 8.1km 구간을 운행했다. 처음에 마련된 차량은 황실용 귀빈차 1대와 개방차 8대였는데, “귀빈차는 상자로 된 차로 창문에는 커텐”이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일반 전차는 상등 칸과 하등 칸이 구분돼 있었고, 둘은 가격도 달랐다. 그림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등 칸은 상자형인 반면, 하등 칸은 개방된 형태였는데, 이때문에 개방된 하등 칸의 승객들은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써야 했고, “한겨울에는 북한산 찬바람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껴야 했다.” (43쪽)

당시에는 따로 전차 정류장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선로 각 병문에 서서 기다리다가 수레 오는 것을 보고 ... 손을 들어서 수레 탈 뜻을 보여 수레가 멈춘 후에 탈” 수 있었다. 또한 전차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운행 도중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경우가 많아 사고”가 빈번했다. 그러나 전차 자체가 처음에는 새롭고 신기한 문물이라는 측면에서 소비되고 경험된 측면이 컸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신기한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고, 또 가까스로 전차에 오르더라도 내리지 않아 전차 안은 늘 북적였다.” (44쪽)

1899년 9월에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과 서울 사이의 교통 시간이 불과 두 시간 반으로 줄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이동한 다음 전차로 갈아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철도와 전차의 개통[이] 그 동안 도보 중심의 생활패턴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종로의 보신각과 남대문을 지나 용산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전차 노선이 마련됐고, 이러한 전차 노선이 더욱 확충됨으로써 새로운 생활패턴은 더욱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45쪽)

 

 

[그림2] 도성으로 둘러싸인 1908년의 서울. 지도 정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도성 성문을 통과하는 전차 노선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전차에서 주목할 특징 중 하나는 당시 서울이 중세 성곽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까닭에 전차가 “성문을 통해 도성 안과 밖을 왕래”했다는 것이다. 그림2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도성의 동서 대로인 종로를 지나 동대문 밖 청량리에 도착한 전차는 다시 남대문 밖 용산과 서대문 밖의 마포에 이르렀다.” (45쪽) 그러나 1907년 성곽을 헐고 그 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전차 궤도도 이설될 수밖에 없었다. 전차 궤도가 이설되면서 단선 궤도는 모두 복선화되었고, 새로운 전차 노선 역시 도심을 중심으로 빠르게 신설되기 시작했다. 전차 교통의 미래를 밝게 생각한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된 것이었다.

전차 노선의 확장은 강제 병합 이후에도 지속됐다. 1910년 경에는 청계천의 남쪽, 즉 남촌 일대에 새로운 노선이 집중적으로 신설됐다. 기존 “용산선과 대비되는 신용산선이 1910년 7월에 개통”됐고, “오늘날 을지로에 해당하는 황금정통을 지나 경원철도의 왕십리역까지 전차가 운행”했다. 한편 “1916년에는 본정 4정목에서 조선총독부의원과 창경원을 연결하는 본정선도 완성”됐는데, “조선총독부 신청사 공사가 시작”된 이 즈음부터는 “경복궁 주변으로 전차 노선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차 노선은 영추문, 효자동을 지났고, “광화문 앞에서 분기”하여 “안국동을 지나 종로 노선에 접속”하게 됐다. (45쪽) 1928년에는 태평통 노선이 개통돼 총독부에서 경성부청, 경성역이 연결됐다. “이 노선으로 정치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에서 군사령부가 있는 용산까지 직통 운행이 가능해졌다.” 필자에 따르면 “전차 노선이 집중적으로 신설된 이 시기는 서울이 전통 도시에서 근대 도시로 이행하는 과도기”라 할 수 있었다. (46쪽)

 

[그림3] 1929년 전차와 부영버스 노선도. 전차 노선은 붉은 선으로 표시돼 있다.

1920-30년대 경성부의 확장과
교통 문제

1920년대로 접어들어 도시교통은 자동차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일본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동경에 도입된 시영버스가 변화의 계기였다. 당시 경성에서는 버스 도입이 시기상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1925년에 버스 도입이 처음 시도됐고, 3년 뒤인 1928년에는 경성부의 부영버스가 공식적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당시 버스는 크게 두 개 노선으로 운행됐다. 아래 그림4의 노선도에서 볼 수 있듯, “1호선은 경성역에서 출발하여 조선총독부를 지나 대화정 1정목(헌병대사령부)에 도착하는 노선”이었고, “2호선은 경성역에서 황금정통을 따라 3정목까지 이동한 후 여기서 갈라진 한 노선이 창경원을 경유해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이르렀고, 다른 한 노선이 장충단과 경성운동장을 왕래”하는 식이었다. (47쪽)

전차 교통의 관점에서 문제는 위 그림3의 노선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당시 버스 노선이 전차 노선과 상당 부분 겹쳤다는 것이다. 버스와 전차의 경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교통인구가 한정된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면 심각한 경쟁은 전차와 버스를 운영하는 회사에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는데, 무엇보다 경인버스가 1929년 청량리에서 인천까지 운행을 시작하면서 전차와 버스의 도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47쪽) 그러나 경성에서는 도시 교통의 주도권이 전차에서 자동차로 옮아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자동차의 보급은 도시 내 전차뿐 아니라 철도에도 치명적이었”고 철도 사업에 막대한 이권을 갖고 있던 조선총독부로서는 사태를 결코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철도교통의 발달을 저해하는 자동차교통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세웠다.” 1933년 발포되고1934년 4월 시행되기 시작한 <조선자동차교통사업령>에는 “철도를 중심으로 한 ‘1노선 1영업주의’의 원칙”이 담겨 있었고 이로써 “동일 노선에서 경쟁하는 교통기관”은 “궤도 중심으로 합병”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경성전기(주)는 “전차의 경쟁상대”인 부영·경인버스를 인수할 수 있었다. (48쪽)

 

[그림4] 운행 초기 부영버스 노선도 (1928년)

 

1920-30년대 경성의 도시교통 체제가 마주한 또 다른 문제는 인구 증가와 이로 인한 경성의 확장이었다. 이 시기 행정구역을 확장하며 꾸준히 성장한 경성부는 “1936년 4월 기존의 약 4배”가 될 정도로 팽창했다. 기존 행정구역에 “동쪽으로 중랑천, 서쪽으로 홍제원천, 남쪽으로 영등포를 포함한 동작리와 번대방리, 도림리의 일부지역”이 더해진 것인데, 이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교통 문제를 일으켰다. 도시교통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졌으나 경성내 교통시설은 부족했고, 특히 “통근·통학시간에 집중되는 교통수요는 교통난으로 이어졌[다].” “만원전차(滿員電車)”는 이 시간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48쪽)

이런 풍경은 당시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가령 1938년 6월 3일자 한 만평(그림5)은 “타는 전차가 아니라 매달리는 전차!”라는 글귀와 함께 위험천만한 전차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1939년 5월 24일자 기사는 유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요즘 서울 전차는 밤낮으로 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중간 정류장에서는 만원전차를 혹은 4대를 놓쳐도 좀처럼 올라타기 어려운 형편이다. 아침의 출근 및 등교시간과 저녁의 퇴근 및 퇴교시간의 복잡한 광경은 어느 정류소에서든지 볼 수 있는 바로서 이런 때에는 모두들 서로 먼저 타려고 덤벼드는 바람에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은 위험해서 좀처럼 전차 곁에 발을 가깝게 들여놓을 수 없는 터이며, 그 밖에 보통 시간일지라도 간선전차는 대개 만원이어서 승강대에 매달려서 가는 모험을 하는 승객도 많은 터이어서 전차교통의 혼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50쪽)

실제 사고도 뒤따랐다. 1937년 5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위험을 무릅쓰고 만원전차에 매달린 학생들이 전주에 부딪쳐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50쪽)

 

[그림5] 타는 전차가 아닌 매달리는 전차. 출처: <朝鮮日報> 1938년 6월 3일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로는 “휘발유가 군수물자로 지정되어 보급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전차가 경성부민의 이동을 오롯이 맡게 되었[고]” 이는 자연히 교통난을 악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전차 “급행화”가 대안으로 제시됐다. 전차를 “러시아워 동안 유동인구가 많은 정거장에만 정차”시킴으로써 전차의 운행회수를 늘리고 이로써 승객의 이동을 더 용이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논의 끝에 1940년 4월 1일 첫 급행열차가 운행됐다.

아래 그림6은 당시 급행전차의 운전안내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급행전차는 119개 정류장에서 ● 표시한 43개소를 통과하여 ○표시된 곳에만 정차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평소 오전 러시아워 동안 운행하던 전차 364대는 407대가 되어 43대의 증차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8월부터 전차는 하루 종일 급행으로 운행했고, 통과 정류장도 모두 폐지되었다.” 이태 후인 1942년 4월에는 “29개의 정류장을 추가로 통과하는 ‘급급행(急急行)’ 전차가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입석 전차도 운행”됐다.

 

[그림6] 1940년 4월 시행된 급행전차 운전안내도. 출처: <每日新報> 1940년 3월 28일

 

해방 후의 변화

필자에 따르면, 이처럼 일제 강점기 말엽 경성의 도시 팽창으로 인한 교통난 경감을 위해 급행전차나 입석전차가 도입됐고 이런 정책이 일부 효과를 발휘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동차 교통을 억제한 데 따른 임시방편적 수단에 가까웠다. 전시체제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행정당국이 주체적으로 교통난 해결에 나설 기회는 해방이 된 후에 찾아왔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울 도시교통의 주도권은 마침내 전차에서 자동차로 옮아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필자가 쓴 다른 논문을 참고하여 <서울 지역 전차(電車)의 흥망성쇠 (2)>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최인영 (2015), 「6 · 25전쟁 전후 서울지역 교통환경의 변화와 電車의 한계」, 『도시연구』, 7(2)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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