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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군사기지화의 역사동아시아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에서 섬들은 어떻게 이용당해 왔나
강병준 리뷰어 | 승인 2017.11.24 13:49

정영신 씨의 논문 「동아시아 지평에서 바라 본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문제」(『내일을 여는 역사』 46, 2012년 3월)에 따르면, 논문이 쓰이던 2012년 무렵 진행 중이던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동아시아의 현대사에서 네 번째로 진행된 제주도의 군사기지화 시도다.

첫째 시기인 1940년대 2차대전 말기에 일본은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잃기 시작하면서 서태평양에서의 지상전을 염두에 두고 일본 본토 주변의 각 섬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1960년대 말에는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문제로 미군의 오키나와 기지의 존폐가 문제되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미군 활동이 약화되면 안보 위기가 닥쳐올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제주도를 미군 기지화할 것을 적극 제안했다. 세 번째 시도는 1980년대 말에 추진된 국군 공군기지 건설 계획이었는데 1987년의 대투쟁을 겪으며 성장한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무산되었고, 그 이후 네 번째로 시도된 것이 강정마을제주해군기지라는 것이다.

이같은 굵직한 규모의 기지화 시도 외에도 1930년대에 건설된 일본군 항공기지, 한국전쟁 시기에 배치된 군사기지 등 비교적 소규모였던 기지화 시도들과, 제주도의 현대사에서 빼놓고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인 4.3사건을 시야에 둘 때 저자의 관점은 뚜렷해진다. 저자는 제주도에서 추진된 대규모 군사기지화 시도의 역사들을 살펴보면서 두 가지 정도의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한다. 첫째는 제주도의 역사가 오키나와의 역사와 서로 겹쳐 보이며 또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두 섬의 군사기지화 추진이 동아시아에서의 지정학적 세력 구도 변동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 분단체제

'동아시아에서의 지정학적 세력 구도'를 저자는 "동아시아 분단체제"로 명명한다. 이는 크게 보아 2차대전 종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냉전 대립구도의 일부이나, 유럽 등지의 경우 종전과 동시에 냉전 구도로 이행해 사실상 그 '전선'에 변동이 크지 않았던 데 비해, 동아시아의 경우 제2차 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의 전쟁을 거치며 1970년대까지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다층적이고 복잡한 분리, 분단 체제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는 미소 중심의 냉전적 대립, 한반도나 중국-대만, 베트남, 일본-오키나와 등 각국의 분단 문제, 그리고 일제 침략의 피해를 받은 아시아 각국과 일본 간의 심리적 갈등 등으로 층화되어 있어 "한 번의 충격으로 해소될 수 없는 복잡한 대립"이었고, 이 때문에 동아시아 분단 체제의 변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났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 거시적 변동의 시기 때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 두 섬에서는 군사기지화가 추진되었고, 두 섬의 역사에서 일본, 미국, 한국의 이름은 비슷한 순서로 등장한다.

1) 첫째 시기 일제에 의한 기지화는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했던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1945년 2월에 입안된 '결호작전'에 따라 일본군은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쿠 등 일본 본토 각지에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전을 준비하는데, 예외적으로 해외영토인 제주도에 '결7호'를 할당해 기지화를 진행한다. 연합군에 제주도를 점령당할 경우 관동군의 본토 합류가 저지될 뿐 아니라 연합군이 이를 해·공군 거점으로 활용하여 큐슈 상륙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개번 맥코맥 교수

제주도민들이 기지 공사를 위한 노동력으로 가혹하게 동원되고 있던 1945년 4월 무렵에 오키나와 도민들은 일본군으로부터 옥쇄를 강요당하며 처절한 혈투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이해하는 개번 맥코맥 교수의 관점은 참고로 삼을 만하다. 왜냐하면 맥코맥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는 근본적으로 일본이 오키나와를 "사석(捨石)"으로 삼아 "일본에서 따돌리고 버리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섬들은 본토 결전에 앞서 연합군에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기 위한 "방파제" 역할을 강요당해 처참한 피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전투 직후인 1945년 7월 무렵에 이미 덴노는 전후에 본토 할양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 등 주변 도서를 포기할 뜻을 내비춘 것이다. 정영신 씨가 제주도의 군사기지화를 "국가가 전세계적 · 동아시아적 규모의 체제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지방을 방파제로 삼거나 체제안정의 비용을 변경지대로 떠넘기려" 한 시도로 이해하는 것과 비교할 때, 제주도와 오키나와 두 섬의 군사기지화가 지니는 성격은 이 대목에서 이미 겹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시기1960년대 말의 상황 속에서 제주도와 오키나와 두 섬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오키나와의 미 군정 종료 및 일본 복귀가 현실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직접적 당사자인 일본 · 미국 양국 뿐만 아니라 한국 · 대만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오키나와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의사를 개입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한국과 대만 역시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안보적으로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력이 사라지거나 축소될지 모르는 상황을 공포로 받아들였고,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가 철수 혹은 축소된다면 제주도로 새로운 미군기지가 신설 이전되어야 한다고 집요하고도 간곡하게 요청했다. 이같은 한국과 대만 정치권의 불안감은, 오키나와 반환이 민정권만을 이양했을 뿐 미군기지는 형식적인 수준의 축소만을 거쳐 그대로 유지되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기만적인 내용으로 합의됨에 따라 해소되게 된다.

이 시기의 맥락을 저자는 "동아시아 분단체제의 첫 번째 이완기"로 규정하며, "미국의 경제력 쇠퇴와 베트남전 패배", "미중 접근(1969~1972)와 일중 수교(1972)"로 분단체제의 긴장이 일부 완화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로 이해한다. 그런데 강대국 간 냉전적 긴장의 완화는 "한국과 대만 등 반공독재국가의 지배층"에게는 오히려 위기감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같은 위기감은 계엄령, 긴급조치, 유신헌법 등 반공 권위주의체제의 강화로 드러났는데, 제주도 군사기지화 시도는 이것이 "물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고 저자는 이해한다.

3) 같은 관점에서 세 번째 시기 군사기지화 시도의 맥락도 이해할 수 있다. 1980년대 말에는 한국, 대만, 필리핀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어 독재 체제가 종식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은 중국 및 소련과 수교하는 등 한반도에서 약간의 긴장 완화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이 시기를 "두 번째 이완기"로 규정하는데, 제주도 대정읍 · 송악산 지역과 서산군 해미읍 등에서 추진된 국군 공군기지 확충 시도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필리핀에서는 민주화의 여파로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반기지운동이 거세어지고 있었는데, 필리핀에서 철수하게 될 미 해군기지의 일부가 일본 혹은 한국으로 이전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제주도와 서산군의 반기지운동 주체들은 이 지역에서 추진되는 기지 건설이 미군기지를 이전시켜 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의혹이 사실인지는 아직까지도 "관련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언하기 힘들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결국 필리핀에서는 1992년에 미군기지가 전면 철수했지만, 제주도와 서산군에서는 반대 운동의 성과로 기지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성장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긴장 관계에 균열을 냄으로써 불확실성을 야기해 군사기지화 문제가 떠오르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 군사기지 건설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시민사회와 주민 운동간의 연대에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를 남기기도 한 셈이다.

4) 강정마을에서 강행된 네 번째 군사기지화의 맥락으로 저자는 "전후에 형성되었던 동아시아 분단 체제가 장기 이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분단체제의 해체와 평화체제로의 이행" 가능성에 대한 희망 섞인 전망이 제시되었지만, 2001년 이후로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그에 뒤따른 미군 재편 계획, 중국의 부상에 따른 긴장 등으로 인해 동아시아 분단체제는 해체가 아니라 "장기적인 이행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진단이다.

"특히 미국은 경제력의 쇠퇴를 군사력으로 만회하기 위해" 한국 및 일본과의 군사동맹 강화를 추진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은 강화하고자 하지만, 그에 필요한 비용은 되도록 한국 및 일본에 많이 분담시키고 싶어하고 있다. 2012년 당시 한국 정부는 이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려 애썼고, 그같은 맥락에서 제주해군기지의 건설은 추진되었던 것이다.

 

시민사회의 국제연대와
운동의 과제

저자는 제주도, 오키나와, 필리핀 등 각 지역에서의 군사기지 문제가 서로 맞물려 전개되어 온 역사를 상기시키며, 오키나와에서의 반기지운동 성장과 제주도에서의 군사기지 기반시설 확대가 맞물리면 미군에게 있어서 점차로 제주도의 군사기지화를 확대하고 싶어지게 되는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을 우려한다.

국가가 지역에 "평화와 안보의 비용"을 떠넘기려 하는 것이 군사기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때, 그에 저항하고자 하는 각국의 시민사회와 운동이 서로 연계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우리 지역에만 군사기지가 들어서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사회의 무책임과 무감각의 구조"를 이루어 각 지역끼리 서로 문제를 떠넘기며 돌려막는 식으로 안보체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확대되어 온 각국 시민사회 간의 국제 교류와 연대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역사적으로 제주도의 군사기지화는 동아시아의 체제변동과 맞물려 진행되어 왔고, 그 체제변동의 유동적 상황은 "한편으로 해방이나 민주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나 대규모의 국가폭력을 수반하기도 했다." 따라서 제주도 및 오키나와 군사기지 문제의 향방과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역할은 동아시아 체제가 평화적으로 이행할지 혹은 폭력적 파국을 맞을지를 가름하는 키일지도 모른다.

제주도 군사기지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국가 권력이 정의하는 '평화'나 '안보'가 시민을 실제로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평화'와는 동떨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규모 군사적 충돌의 위험이 감소하는 분단체제의 완화 시기에 오히려 각국 정권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다시금 높은 군사적 긴장과 냉전적 대립 체제의 강화를 통해 정권의 위기감을 해소하려 했고, 그같은 맥락에서 군사기지화를 시도했으며, 그렇게 시도된 군사기지화를 통해 국가의 주변부인 섬 지역은 희생당할 위기에 놓여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두 가지 가치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의 의사를 묵살한 채 국가 권력에 의해 추진되는 군사기지화는, 대중 정치의 차원에서는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려는 시도이면서, 지정학적으로는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전쟁 위협을 높이는 위험한 치킨 게임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띠는 복합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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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화, 「'분단'과 '분단'을 잇다 - 미군정기 오키나와의 국제연대운동과 한반도」, 『상허학보』 44집, 2015.06

개번 맥코맥, 「400년의 류큐 - 오키나와와 동중국해 기지문제의 현재」, 『아시아리뷰』 제5권 제2호 (통권 제10호), 2016.02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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