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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禁句)에서 종북(從北)까지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개념 변천사
김연정 리뷰어 | 승인 2017.10.28 21:23

새 정부 출범 이후 고위 공직자 인사 때마다 ‘진보․보수’성향 검증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추천된 인사가 가진 해당 분야의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그 사람의 과거 경력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진보’ 혹은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 평가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보․보수’ 논란은 짧지 않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을 달리해왔다.

이나미의 「한국의 진보·보수 개념 변천사」 (『내일을 여는 역사』67, 2017)는 논문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의 진보와 보수 개념 변천사를 살펴보는 논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 개념 변천사를 보는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각 세력과 그 환경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의미 있다며 본 논문의 의미를 설명한다.

 

진보와 보수,
유사성과 차이

본 논문은 ‘진보’라는 말이 한국사에서 보여주는 진보의 위상과 굴곡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서양, 특히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주로 liberal과 conservative로 쓰는데, progressive보다는 주로 liberal을 conservative의 반대어로 쓴다. 유럽의 경우에는 진보, 보수를 가리킬 때 left와 right를 많이 쓴다. 우리나라도 본래는 ‘진보ㆍ보수’보다는 ‘좌파ㆍ우파’를 더 많이 썼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좌파를 심하게 탄압하고 반공주의가 득세하면서 좌파 대신 진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저자는 한국의 진보ㆍ보수 개념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진보와 보수의 관계를 논한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사실상 진보가 그 태생을 보면 보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영어 progress는 점진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질서 있는 발전을 의미하는 ‘보수적’ 개념이었다. 즉, 급진적인 혁명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반대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동양권에서의 진보 개념 역시 본래는 점진적인 것이며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양에서 한자어 ‘진보(進步)’는 매우 오래된 용어로, 본래 뜻은 글 자 그대로 “발걸음을 앞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개선, 발전 등의 추상적 의미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학문적 발전’이나 “앞으로 나아감”, “일이 목표대로 잘 되어감” 등의 의미로 쓰였다.

보수도 변화를 전혀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 부분적 변화를 시도한다.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는 혁명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혁은 때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의 진보와 보수 개념은 그 출발점에서 보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보수 개념 또한 진보 개념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정치적ㆍ이념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보수(保守)’는 말 그대로 단지 ‘지킨다’는 뜻으로 쓰였다. 저자는 이념적 의미를 갖게 된 보수 개념 역시 처음에는 진보와 반대 되는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원론󰡕(황성신문사, 1906)에는 “보수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로되 진보하는 가운데 질서를 보유하기로 제일의 뜻을 세우”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저자는 진보가 ‘변화의 방식’ 즉 ‘점진적 변화’를 뜻할 때는 보수와 일치하지만, ‘변화의 이유’에서는 진보가 보수와 다르다고 본다. 저자는 그 차이를 진보와 보수의 인간관과 사회관, 역사관에서 찾는다. 진보주의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인간의 합리성․계몽주의․산업혁명의 결과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진보주의자는 인간 이성을 통한 사회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면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을 불신한다. 보수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평등’도 믿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진보는 평등을 믿는 것이고 보수는 불평등을 믿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인간을 믿는 사람은, 인간은 누구든 존엄하며 또한 누구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을 불신하면 인간 자체가 아닌 그가 가진 능력, 재산, 가문 등을 보게 되고 결국 차별적 인간관을 갖게 된다.

 

근대 시기
한국의 진보와 보수

진보가 평등을 믿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 역사에서 ‘진보’라는 용어가 늘 ‘진보적’이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진보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전통시대의 진보는 학문적으로는 “성인의 뜻을 헤아리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보수적이며 다소 수구적이기까지 하다. 저자는 근대 시기의 진보 역시 평등의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19세기말 한국에 근대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문명진보’, ‘개명진보’가 강조되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모두 구습을 버리고 신식을 따르는 것을 진보로 보았다. 문명개화가 목표로 설정되면서 이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였다. 이때의 진보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진화’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즉, 경쟁적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을 진보로 본 것이다. 이 시기의 진보는 사실상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대표격인 사회진화론, 적자생존론, 제국주의, 서구화를 옹호하는 담론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결성된 ‘진보회’는 이후 일진회로 계승되었으며, 이용구․송병준 등 친일파가 주도했다.

한편, 이 시기 보수에 해당하는 말은 ‘수구’와 ‘완고’였다. ‘개명진보’의 반대어로 ‘수구완고’가 자주 쓰였고, ‘수구파’는 친일개화파를 반대하는 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주로 사용됐다. 임오군란 당시에는 대원군 세력을, 갑신정변 전후로는 친청파를, 그 이후로는 명성황후 측을 비난하기 위해 쓰였다. 이렇듯 수구는 대체로 일본이 자신의 반대파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진보ㆍ보수 개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부터이다.

“능히 진보와 보수 양당으로 하여금 그 종지를 평균히 보전하니” “상원의원은 대개 보수당이 많고 하원의원은 대개 진보당이 많으니라(上院之員은 每多保守黨이오 下院之員은 每多進步黨이라)” (106쪽) (국가사상학 정인호, 1908)

이후 진보 개념은 사회주의 유물사관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 목표를 전제한 개념이 된다. 이때 보수와 반동은 진보와 반대어가 되고, 진보는 좌파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등장

저자는 1950년대 중반부터 진보·보수가 유의미하게 통용되었다고 서술한다. 1954~55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신당운동이 진행되면서 당의 이념과 정책, 결집할 정치세력의 범위를 놓고 ‘보수세력’, ‘진보세력’이란 말이 생겼다. 그 이전 까지는 여당·야당을 주로 사용하다가 신당 운동 이후부터 조봉암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진보,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로 규정되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계획적 경제체제’를 수립하여 산업의 부흥, 국가발전,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를 실현하는 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고 주장했다. 조봉암이 유력한 경쟁자로 떠오르자 이승만은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사형시켰다. 그러면서 진보는 일시에 금구(禁句)가 되었다.

봉건적이란 말에 준식은 “그럼 미스 최는 진보적이요?”라고 응수했다. “진보란 말은 요즘 안쓰는 거예요. 소식불통이네. 그게 금구(禁句)가 된 줄도 모르시는군. 현대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108쪽) (1958년 3월 21일 동아일보 연재소설 「격랑 중에서) 

 

ⓒ위키백과, 2017년 3월 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태극기 집회 시위자들

 

민주화운동과
진보·보수 논쟁

진보ㆍ보수논쟁은 1960년 4월 혁명과 함께 다시 시작되고, 5․16 군사쿠데타와 더불어 사그라든다. 진보 개념은 다시 금지어가 되었다. 학생들이 선언문에 ‘친진보’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진보 진영에서는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사회주의 이념 논의가 활발해지며 여러 다양한 진보 단체가 생겨났다. 본 논문은 그 이전까지 진보는 ‘관념’으로만 보수는 ‘집단’으로만 존재해왔다고 평가되었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진보는 집단을 갖게 되고 보수도 이념의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분석한다.

진보 개념은 1980년대 초반 대학신문에서 많이 쓰이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변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1989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혁명과 변혁보다 진보의 사용빈도가 높아졌다. 1990년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라는 말보다 ‘진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고, 그 후 ‘진보’가 대표 용어로 자리 잡는다.

 

보수의
위기와 변신

1990년대 중반에는 보수주의 이념이 적극적으로 주장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그전에 보수주의가 별로 주장되지 않은 이유를 우리 사회가 확실하게 보수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보수 세력은 정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진보 시민단체들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단체를 조직했다. 특히 북핵문제 대두를 계기로 보수단체가 대거 창립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 영남 출신 노무현이 진보 진영의 후보가 되어 당선 된 후 보수단체들은 변화를 보인다. ‘뉴라이트’란 개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이들이 정권 탈환에 계속 실패하면서 변신 필요성을 자각한 것이다. 우선, 이들은 보수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과거에 이들이 보수를 별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 역시 저자는 그러한 이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이 이미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보에 낙인찍기:
빨갱이에서 종북까지

보수 세력은 일관되게 북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보수를 표방한다고 할 때, 한국 상황에서 특수하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논리적 보루가 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존재로 인해 진보는 여러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빨갱이’였다가 이후 ‘친북’, ‘용공분자’가 된다. 한때는 ‘주사파’로도 많이 불렸다. 그러다가 1994년 안상운 변호사가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명예훼손으로 문제 삼은 것을 시작으로, 한국논단』,의 주사파 비방보도 법정 싸움, 박홍 총장을 상대로 한 한국통신 노조의 승소 등이 이어졌다. 이후 안 변호사의 주도로 언론인권센터가 출범하면서 주사파 용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것이 ‘종북’이다. 저자는 주사파가 구체적인 용어라 물증이 없으면 명예훼손으로 피소되기 때문에 보다 모호한 표현인 ‘종북’이 더 선호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종북은 북한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찌질한’ 느낌도 준다. 따라서 멋을 중시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후져 보이는 ‘종북’ 담론은 공격용으로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종북으로 지칭되는 대상은 진짜 종북주의자 보다는 이런 저런 점에서 사회적 약자들이거나 그들 편에 서는 세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 지지자들이 그러하다.

저자는 료타 카나이의 연구를 인용하며 뇌과학 이론에서 진보가 보수보다 긍정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보수 역시 진보 개념을 탈환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저자는 진보라는 가치를 탈환하고 싶어 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우선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무엇으로 정당화하는지 자신의 민낯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제언으로 본 논문을 마무리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이나미․정환봉․후지이 다케시, 「보수적 사회단체, 어떻게 움직이나」, 『창작과비평』, 2016 가을호.

이항우,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담론」,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16.

 

김연정 리뷰어  equ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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