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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노벨 문학상에 집착할까노벨 문학상의 정치성에 대하여
최은영 리뷰어 | 승인 2017.10.22 07:49

매년 10월이 되면 노벨상 수상 결과로 모든 매체가 들썩인다. 노벨상은 그 명예로움에 있어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기에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면 그를 둘러싼 논란과 후일담 또한 풍성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 중에서도 유독 노벨 문학상에 과도한 관심이 집중되는 특이한 현상이 매년 반복된다. 특정 문학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마치 올림픽 금메달 수상 가능성을 예측하듯 이번에는 수상이 가능할까, 누가 수상의 쾌거를 올릴까 등의 논조로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반복 생산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대학 통번역학과 김욱동 교수의 「노벨 문학상의 문화 정치학(외국문학연구 제37호)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과도하게 집착하는 노벨 문학상에 대해 이 상이 가진 문화 정치학을 논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기준의 변천을 통해 노벨 문학상이 수상자를 통해 전하고 싶은 정치적 메시지와 노벨 문학상이라는 브랜드를 어떻게 정치화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과연 순수한 문학상인가

사실 국제적인 시상식을 두고 순수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순수’하다는 것의 기준도 모호하거니와, 특정한 심사위원들이 일정한(자의적인) 심사 기준으로 수상작을 결정한다는 데서 이미 객관적인 순수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영화제나 아카데미시상식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도 해마다 그 수상자와 수상작에 대한 논란에서 비켜간 적이 없고, 자국 문학상이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공쿠르 상이나 맨부커 상도 화제성만큼이나 뜨거운 논평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문학’이란 과학이나 경제와 같은 객관적인 성과 지표가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과연 예술을 특정한 세력이 평가하고 그 가치를 논할 수 있느냐는 점에서 늘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은 “이상적인 방향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한 작가에게 수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공헌’이라는 첫 번째 기준도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특히 ‘이상적인 방향’이라는 두 번째 기준은 더더욱 애매모호하다.”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을 지낸 안더스 외스테를링(Anders Österling)은 이 어휘를 ‘긍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향’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한편 역시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을 지낸 스투레 알렌(Sture Allén)은 ‘독립적인 입장’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렇듯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의 역사는 바로 이 ‘이상적인 방향’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느냐 하는 해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의 수상 기준은 “스웨덴 한림원의 예술적 감수성에 따라, 시대정신과 예술관에 따라 그 해석”이 사뭇 달라져 왔다.

그렇다면 ‘이상적 방향’이라는 어휘를 해석하는 과정, 즉 그동안 노벨 문학상의 선정 기준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논문의 필자는 크게 일곱 가지로 그 경향성을 분석한다. 첫째 고상하고 건전한 이상주의(1901-1912), 둘째 중립적인 정책(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셋째 훌륭한 문체(1920년대), 넷째 인류에게 보편적인 관심사(1930년대), 다섯째 문학예술의 개척자들(1946년 이후), 여섯째 잘 알려지지 않은 대가들(1978년 이후), 일곱째 전 세계의 문학(1986년 이후)이 그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노벨 문학상 초기에는 고상하고 건전한 이상주의를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스웨덴 한림원과 노벨위원회가 “선정 기준으로 내세운 가치는 괴테가 ‘세계문학’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가치, 그리고 가족과 국가와 교회를 신성하게 생각하는 보수주의적 이상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초반기의 이런 선정 기준은 세계적인 사건의 발생, 사상과 시대 양상의 변화에 따라 곧 바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스웨덴 한림원과 노벨위원회는 ‘이상적 방향’이라는 막연하고도 편협한 기준에서 점차 벗어나 작가의 ‘훌륭한 문체’를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삼았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편적 관심’이라는 또 다른 선정 기준을 내세웠다.” 다시 말해,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서 지구촌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명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에 큰 점수를 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부터는 다시 한 번 선정 기준이 바뀌었는데, ‘개척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실험적이고 개성 넘치는 작가들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그러다가 1978년 이후 ‘실용적 고려’가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실용적 고려’라는 말은 “그동안 세계 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를 새롭게 발굴”하여 상을 주겠다는 의미이다.

이 선정 기준은 1986년부터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는다. “‘전 세계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세계성’을 선정 기준으로 천명한 것은 “그동안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가 지나치게 유럽 작가들에게 치중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계나 아시아계의 비유럽 작가들한테는 노벨 문학상은 그림의 떡이요 병풍 속의 닭이라는 비판이 일어났고, 이러한 비판이 스웨덴 한림원과 노벨 위원회에게는 적잖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4년 스웨덴 한림원의 사무총장 길렌스텐은 ‘전 지구적 배분을 이룩하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이 “대륙 문학의 위대한 작가들한테만 수여”된다는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비유럽계 작가들을 수상자로 선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선정 기준이 시대별로 자주 바뀐 이유는 “새로운 시대의 문학적 취향과 시대정신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논문의 필자는 말한다. 지난해 대중음악가인 밥 딜런(Bob Dylan)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이유도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벨 문학상의 선정 기준을 ‘정치성’, 또는 ‘정치적 배려’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노벨 평화상 또한 이런 정치색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듯 노벨상 수상자 선정의 이면에는 노벨상이 지닌 명예와 권위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전달하려는 정치적 수사가 숨어 있다.

 

노벨 문학상의
권위를 넘어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애매모호한 선정 기준뿐만 아니라 다른 노벨상과도 적잖이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다른 상과는 달라서 좀처럼 한 사람 이상에게 공동으로 상을 수여”하지 않고, “단순히 순수 문학 장르에 속하는 문학가뿐만 아니라 역사가나 철학자에게도 상을 수여”해 왔다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의 선정 기준이 이중적이었고”, “주로 유럽 작가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아동문학 등의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다.”

논문의 필자는 “노벨 문학상은 선정 과정에서 다른 어떤 노벨상보다도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문학적 성과나 업적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처럼 계량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노벨 문학상은 수상자를 선정하기가 무척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노벨상과 관련하여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유언장에서 밝힌 ‘이상적인 방향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이라는 구절도 언뜻 보면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표현 같지만 좀 더 꼼꼼히 따져 보면 적잖이 문제가 있음이 밝혀진다. ‘이상적’이라는 어휘도 문제지만 ‘가장 뛰어난’이라는 기준도, ‘가장 큰 공헌’이라는 기준도 하나같이 객관적 평가보다는 주관적 평가, 절대적 평가보다는 상대적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즈음이면 우리나라 각종 매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노벨 문학상에 대한 염원은 이제 거의 강박이 된 듯하다. 이쯤에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는 문학상을 자본주의 사회의 한 전형적인 제도로 보았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러한 제도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며, “내가 ‘장 폴 사르트르’로 서명을 하는 것과, ‘노벨상 수상자 장 폴 사르트르’로 서명하는 것은 서로 같지 않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작가란 설령 가장 명예로운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한 제도로 변형되는 것을 거부하여야 한다”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보다 늦게 수상한 데 따른 불만의 표출이었다고 그의 행위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런 가십을 떠나서 제도와 권력이 된 문학상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분명 의미 있는 발언이다.

이제는 우리도 노벨 문학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를 번역해서 맨부커 상을 수상한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는 2016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 노벨상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obsessed)이 약간 당황스럽다”며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독자가 잘 감상하고 즐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에겐 충분한 보상이 된다. 상은 그저 상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특정한 문학상에 대한 과열된 집착은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적으로 더 많이 읽히고 우리나라 문학의 가치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욕망이 아니다. 타자에게 인정받아야만 그 가치와 작품성이 완성된다는 콤플렉스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문학의 보편성과 작품성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과 시도를 얼마나 꾸준히,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느냐는 점일 것이다. 좋은 번역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국내의 문학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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