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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숙의민주주의는 시기상조인가문화가 아니라 제도, 권력의 문제
최은영 리뷰어 | 승인 2017.10.17 20:54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방식으로 정책 결정이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공약과 관련해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중단할 것인가,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공론화위원회가 조직돼 시민참여자들의 활동이 끝난 것이다. 국가사업에 대한 지속 여부를 시민들의 의견 수렴으로 결정한다는 이른바, 숙의민주주의가 첫 실험대에 올랐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 결정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법적 근거가 없는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은 졸속 의견이 될 수 있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고, 일부에서는 숙의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시기상조라는 반론을 들고 나왔다. 탈핵이라는 뜨거운 이슈와 더불어, 과연 숙의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효율적이며 현실성이 있느냐는 논의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립학교 도시사회학과 교수 임동균, 이상아 「숙의민주적 공공갈등 해결과 ‘한국적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 검토」(사회과학연구 제28호 제3호)는 바로 이런 숙의민주주의의 시기론을 비판하면서 “숙의 모델이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에 있어 쉽게 활용되지 않거나 정착되지 못하는 것은 문화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도, 권력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한국적 문화는
숙의민주주의를 방해한다?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과거에는 정부가 독점적으로 진행했던 정책 결정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또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주체의식이 성장하면서 정치 민주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숙의민주주의 의사 결정 방식이 점차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이나 평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문화 맥락에는 아직 성숙된 숙의 갈등 해결 방법이 맞지 않다는 우려나 비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소통보다는 절제와 침묵을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권의 나라에서는 타협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 도덕 의무가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여지면서 논쟁과 협의 과정을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압축적인 고도성장을 경험한 우리 사회에는 도구 합리성을 강조하는 문화와 물질주의, 불신주의, 개체주의 등의 사회 풍조가 지배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못하며, 그에 따라 편 가르기와 떼쓰기, 상호존중의 상실이 팽배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정치 민주화에 비해 사회 민주화가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는 지적 또한 숙의민주주의 시기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렇게 숙의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측에서 한국적인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은 문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며 그러한 문화 영향을 받은 개인의 행동 양식과 심리 태도 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화의 강력한 영향력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실제로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인정되었으며,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문화의 힘에 대한 이해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행동이론(theory of action)과 문화사회학(cultural sociology)에서는 “문화의 힘을 비교적 단순하고 일방적으로 강조하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행위자들의 행위를 결정짓는 다른 중요한 결정 요인들을 밝혀내면서 행위의 복잡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홉스테드(Geert Hofstede)는 문화차원이론을 통해 “각 사회나 집단의 문화 특성을 크게 다섯 가지의 차원으로 분석”했다. “각 차원은 그 사회·집단에서 무엇이 바람직한지, 혹은 무엇이 자연스러운지가 상당한 지속성을 지닌 가치(value)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섯 가지 문화 가치 차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권력거리, 둘째 개인주의·집단주의, 셋째 불확실성 회피 성향, 넷째 남성성·여성성, 다섯째 장기지향성· 단기지향성이 그것이다.

먼저 권력거리란 “권력, 권위, 경제적인 부, 명성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불평등을 상대적으로 권력을 작게 소유하고 있는 집단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수용하는지 그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숙의민주주의의 시기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가 수평적 토론을 방해한다고 평가한다. 또한 “권력거리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자기 효능감이 낮기 때문에” 숙의민주주의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둘째, 우리나라는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강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집단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거나 집단 전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경향이 있어 숙의민주 문화와는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셋째, 한국은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강한 국가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높은 장기간의 소통, 숙의, 열린 토론 등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문화 특성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넷째, 한국 사회는 남성 문화가 지배적인 국가인데, 여기에서 “남성 문화란 성공과 물질 성취, 업적, 권력, 경쟁성이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리더가 사회의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는 성향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남성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은 “갈등 상황이 벌어졌을 때 빠르고 냉철한 방법과 물질 성취를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차분하게 협력과 합의, 약자의 삶의 질을 고려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숙의민주주의 문화와 거리가 멀다”고 분석한다.

다섯째, “장기지향성 문화를 가진 나라들은 인내를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고 집단 관계나 집단의 목표, 이익 실현에 가치”를 두는데, “한국적 문화에서는 국가의 장기적인 경제적, 실용적 목적을 위해 당장의 피해와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고, 모든 구성원이 과정 자체에 가치를 두고 천천히 숙의와 토론을 하기보다는 장기 목표를 위해 단기 과정을 실용적으로 강조”하는 문화가 팽배하기 때문에 숙의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어려운 문화라고 말한다.

 

한국적 문화는
영원불변하지 않다

논문의 필자들은 숙의민주주의 시기론을 주장하는 측의 다섯 가지 한국 문화론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다. 먼저, “일상적 삶의 영역이나 조직 생활의 문법을 조율하던 권력거리가 분쟁 상황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는 무너지게 된다면서 “기존의 위계질서는 더 이상 한국인들 정신에 깊이 박혀 있는 불변의 프로그래밍된 문화가 아니라, 조건으로 얼마든지 약화되거나 매우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고 가변적인 규약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 특유의 집단 문화는 집단이 가지는 구심력을 통해 오히려 “공동체 차원의 일을 해결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추동력이자 에너지”가 된다면서, 집단은 “오히려 약자들이 그것의 힘을 통해 공공 갈등에 있어 자신들의 이해를 표현할 수 있는 창구가 된다”고 말한다. “한국적 문화론의 비판과는 달리 한국의 집단주의는 사회 자본의 통합적인 힘을 생산하는 문화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 성향이 강하므로 장기적으로 소통하고 토론해야 하는 숙의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높은 불확실성 회피 성향을 뿌리 깊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정도가 제도 신뢰를 통해 통제되기 힘들거나, 정책 수립 단계부터 자신에게 올 피해가 확실하므로 그에 대한 반응으로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불확실성 속에서도 현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제도적으로 추측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구조를 보다 큰 시간 틀(larger time frames)에서 제공해주면 통제된 불확실성 혹은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으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남성 문화라는 것도 “문화가 아니라 외부 환경에 대한 상황 대응 특히, 권력의 불균등한 분포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반응(reaction)”이라고 지적하면서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깊은 문화의 외부 표출이 아니라 권력 비대칭과 그로 인한 개인 자유의 제약 같은 외부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태도”라고 반론한다.

장기 지향성을 가진 사회라는 분석에 대해서도 “장기 지향성에 담긴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 ‘실용적’ 의식이라는 것에 담긴 방법론에 있어서의 유연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런 성향이 “숙의적 갈등 해결 방식과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갈등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한국 문화의 ‘깊이’라는 것은 의외로 깊지 않을 수 있”으며, “홉스테드가 말하는 문화 경향성들도 결국 객관적 조건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것들”이고, “어떠한 문화 경향성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숙의민주주의 갈등 해결에 방해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논문의 필자들은 “문화의 실용적 영향력과 결과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타나는지는 행위자의 창조성과 구체인 상황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행위자의 창조 능력과 상황적 힘이라는 것이 (국가 전체의 거시적인) 문화 경향성보다 더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토론이 부재한 문화, 집단주의가 횡행하는 문화, 남성 중심의 문화라는 한국적 특수성은 제도적 부재나 부실함, 또는 규칙과 가이드라인이 시민들에게 잘 학습되지 못하고 제시되지 못한 상태에서 축적된 문화라는 측면도 있음을 외면한 비판이다. 그런 식의 태도나 성향이 한국인들에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시스템과 체제의 부실함에서 오는 모순이나 갈등 상황이라는 것이다.

안정되지 않은 상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적 경험이나 방식으로 대응 방안을 결정한다. 이것은 불변적인 것도 아니고 고정적인 것도 아니다. “아무리 ‘한국적 문화’에 배태된 행위자라 할지라도 갈등 문제 해결에 있어 생산 해결 방안을 위한 상황적 신호(situational cue)가 소통 과정을 중재하는 제3자, 상대편 당사자 등에 의해 적절히 제시되고, 행위자가 그러한 것을 학습하면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를 행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적 문화로 특징지어지던 행위 양식은 충분히 유연한 성격을 보일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공공갈등들, 가령 밀양 송전탑 문제라든가 제주 해군기지 문제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황을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며 제도화된 규칙과 법규가 얼마나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제도화 자체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현실을 고려한 세심한 디자인이 요구된다. 조정을 위해서는 법 제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법적 해결이 아니라 협상자의 자기결정권을 지켜주는 대화와 협력 중심의 갈등 해결이며, 그 스펙트럼도 사적·자발적 협상부터 공적·강제적인 소송에 이르기까지 그 내적 범위와 다양성도 크다.” “또한 공식 제도화의 이면에 있는, 정책 수립․의사 결정 방식, 정부기관 간 조정 체제, 정부 정책의 일관성과 공공성” 등도 매우 중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미리 방향을 정해 놓고 당사자의 의견은 단지 의견 청취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공공갈등이 발생할 때 당사자들은 그 상황을 위협 또는 위험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 전략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숙의는 결과 중심이고 성과 만능주의인 사고에서 벗어나 질적인 발전을 추구하며, 대화를 통한 상호 간 이해와 신뢰 형성이 기반이 된 토론을 바탕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하는 것과 지식의 확장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다.” 지금까지 관료주의, 권위주의로 인해 발생되었던 한국 사회의 갈등들에 대한 성찰과 국민들의 효율적인 피드백을 통해 정치 신뢰도를 높이고 사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제도화한다면, 숙의민주주의는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과정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갈등을 조정하고 새로운 민주적 가치를 불어넣는 활로가 되어 줄 것이다.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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