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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변화, 성장했나-사상계의 지형을 통해 본 19세기 조선의 변화 양상
최은영 리뷰어 | 승인 2017.10.13 08:41

우리는 흔히 정조(1752~1800)를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왕이라 칭하면서, 그의 죽음으로 인해 19세기 조선은 쇠락한 시기, 문화적으로 피폐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19세기 조선을 “전근대 조선의 마지막이면서 근대 한국의 시작이었으며, 근대화 실패의 원인을 제공한 부정적인 시기로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조성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지형-균열과 가능성」 (『역사비평』 117)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런 인식에 제동을 건다. 19세기는 다양한 사상이 등장하면서 사상계가 역동적으로 개편되던 시기였으며, 그 사상의 물결이 다양한 계층으로 스며들어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어낸 시기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19세기 사상계의 역동성과 경화 현상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사상계 지형의 균열 지점들과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색”해본다.

 

19세기 조선의
사상계

사상적, 문화적 퇴락의 시기라 여겨지는 19세기는 정조 시대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사상적 국면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다. 정조 시대를 떠받들고 있던 사상은 “체제교학으로서의 주자성리학이었다. 정조는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고증학, 소품체 문학 등으로부터 조선의 주자학적 문예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에는 이미 연암 그룹 지식인들의 북학사상뿐만 아니라, 공안파(公安派) 문예 이론, 근기남인들의 천주교 및 서학(西學)의 학술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경향은 새로운 사조에 대한 강력한 척사보다는 정학을 더 강조함으로써 이단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고자 했던 정조의 정책이 빚어낸 산물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문체반정이나 천주교 박해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통해 사상적 자유를 묵인함으로써 다양한 사상이 조선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런 기반에서 자라난 새로운 사조들은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활발해지는데, 주자학의 원심력이 약해지면서 다채로운 실험과 시도가 발생하고, 이것이 다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사상계에 긍정적인 영향과 동시에 부정적인 경화 현상을 동시에 가져온다.

“19세기 주자학과 관련하여 조선의 사상계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첫째는 주자학을 계승·묵수하려는 경향이었고, 둘째는 주자학의 인식론적 한계성을 드러내면서 주자학을 공격하려는 경향이었으며, 셋째는 종교적 심성을 통하여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경향이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분기를 통하여 주자학의 안과 밖에서 19세기 사상계의 지형도가 그려졌다.”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인물들은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세도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든 수호적이든 그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주자학 조선이라는 체제에 순응적인 인물들이었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인물들은 연암 박지원 일파의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주자학적 이기론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인지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즉 이들은 “사물을 설명하는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좀 더 현실적이고 정교한 방법이 필요”하며, “모든 사물의 원리 질서를 보편적인 태극 관념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주자성리학자들을 비판”했다. ‘이’가 갖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성격보다는 각각의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의 개별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 사고가 서울 지역의 유력 가문의 주류 학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에서 작은 균열이 시작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지식인들은 “주자학이 철저히 억압하고 은폐하였던 유학의 종교성을 다시 복원하면서 종교적 심성을 강조”한 이들이다. “이는 종교적인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주자성리학의 이성주의를 비판하고, 새롭게 종교적 심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천주 신앙과 부합하는 면이 많았다. “종교적 사유의 등장은 종교성의 제거를 강하게 표방하였던 주자학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벗어남을 의미했다. 이는 고대의 종교적 사유를 극복하고 중세적 합리주의를 연 주자학의 방향을 가장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이었다. 동시에 근대적 이성주의와도 그 방향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조선 사상계의 가장 문제적이며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주류 “주자학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사유가, 또 한편에서는 종교적 심성을 강조하는 사유”가 나타나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다시 말해 “정조가 구축해놓았던 주자학적 질서가 19세기에 내외로부터 공격받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사상적 기조가 다양한 계층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이 19세기 사상적 지형도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나 의학 등의 학문이 여성, 중인, 농민층에게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확산의 도구는 한문과 언문이었다. 두 언어는 서로를 배척하면서 단독 성장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한문의 보급과 확산으로, 특히 서얼과 중인층 지식인들이 등장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물론 이들은 체제전복적이라기보다 체제수호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사대부에 버금가는 지적 소양을 쌓음으로써 사대부가 독점하던 지식 세계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언문의 보급과 확산으로 천주교가 여성과 농민층에 깊게 파고들었으며 농민 지식인 계층이 성장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지식 체계가 한문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언문을 통하여 구현된다는 것은 한학을 통하여 마련된 기존 지식 체계와 결을 달리하는, 언문만으로 이루어진 나름의 지식 체계가 조선에 새롭게 구축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한학적 유교 질서와 경계 짓기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지식의 확산과 편중,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한문과 언문의 보급과 확산으로 조선 사회는 변화의 에너지를 집약하기 시작한다. “언문 문헌들을 통하여 양반 계층은 아니었으나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농민적 지식인들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주로 훈장, 의업, 소장 대서업, 복술 등에 종사하였으며, 민란과 동학의 성립, 동학농민 전쟁 발생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였다.” 훈장으로 학문을 가르쳤던 전봉준과 최제우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이런 지식을 통해 양반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법률적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의료를 통해 자신을 구복하는 능력을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 영역을 스스로 만들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점차 갖추어”간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농민과 중인들의 이러한 지적인 성장이 “19세기 민란을 통한 농민들의 정치 참여와 민(民)과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대립”을 역사 전면에 등장시키는 지적 배경이 되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논문의 필자는 이런 지식의 확산뿐만 아니라 지식의 지역적 확산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식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서울의 유력 양반가를 중심으로 지역 간 불균형이 지속되었지만, 지식의 확산은 서울이라는 한정적인 장소를 벗어나 지역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함경도와 평안도에서의 유학 지식인 증가는 지식이 지역적으로 확대 생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특히 유학 지식의 증가는 일반 민인들의 유학적 가치관을 고양시켰으며, 또한 그만큼 현실 사회를 유학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농민 반란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필자는 분석한다.

그러나 서울에만 집중된 지역 편향성으로 인한 지방과의 문화적 격차 발생으로 “조선의 유학 지식인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문화적 구심점”이 점차 약화됐다는 점은 19세기 들어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더욱 가속화했고, “이는 지방에서 사회 갈등을 조정하거나 민란을 방지할 수 있는 지방사족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지식 정보를 독점하였던 서울에서 동도서기 혹은 개화사상이 발전할 수 있었다면, 지방에서는 새로운 이념보다는 보수적인 성리학 사상이나 전통신앙의 혼합 속에서 동학과 같은 사유가 발전”하였던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이러한 사상과 정보의 지역적 불균등 현상이 19세기 사상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19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확산과 편중이라는 상반된 경향으로 유지, 보수되었다. 한문과 언문의 보급으로 다양한 계층이 유학 지식을 접함으로써 지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지만, 지식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서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역적 불균형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과 지역 간의 괴리가 더 커지는, 그래서 결국 민란이나 새로운 사상이 농민과 중인 계층에 스며드는 것을 관리하고 막지 못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역적 경화와 불균등이 19세기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였다면, 지식의 대중화와 ‘사’ 의식의 확산은 조선의 새로운 가능성과 동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화 황금기였다는 정조 시대에 비해 이후 조선은 곧잘 암흑기라고 평가받곤 한다. 하지만 정조 시대에 꽃 피웠던 문화는 이후 다양한 형태로 각계 계층과 지역으로 보급, 확산되면서 조선의 변화를 이끈 토대가 되었다. 지식의 편중과 확산이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동시에 존재했던 19세기 조선의 사상 지형도를 읽으면 이후 조선의 변화 조짐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함께 읽어 볼 만한 논문

이경구,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 서울-지방 격차와 지식인의 인식」, 『역사비평』, 2016, 94-118

오수창, 「조선후기 체제인식과 민중운동 試論」, 『한국문화 60』, 2012.12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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