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2012~ 인문/역사
황폐한 민둥산, 미개한 민족조선의 산악은 어떻게 식민 지배의 상상력에 포섭되는가?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7.10.04 08:16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에 조선총독부는 한 장의 지도를 제작했다. ‘조선임야분포도’란 제목의 이 지도는 당시 한반도 전역의 산림 분포를 그려 놓은 것으로서 국립 산림과학원에 따르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마도 최초의 한반도 전역 산림분포도이다.

 

이 지도를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녹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특히 현재 남한 지역에는 녹색이 드문드문 나타날 뿐 대부분의 지역이 적색과 황색으로 덮여 있다. 이는 남한의 대부분이 어린나무가 주로 있는 숲과 민둥산이었음을 뜻한다. 산은 첩첩할지언정 수목은 울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찬모 교수의 논문,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에 나타난 조선 산악 인식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5, 2012.6)은 바로 그들의 인상을 분석하고 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임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조선임야분포도’ [출처: 연합뉴스]

 

미개와 문화 지체의 표상으로서의 민둥산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1920년대의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조선의 산악은 “민족의 자기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들에게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등은 “민족의 기원이 비장(祕藏)된 성소(聖所)이자 종교적 배례(拜禮)의 대상이었으며, 구제(救濟)의 제장(祭場)이었다.” 이는 근대 이전 “선인들의 발자취와 자연물의 관조와 완상을 통해 산행을 심성수양의 계기로 삼던” 관행과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309쪽)

 

그러나 1920년대 전반이 지난 후에는 산행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널리 권장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즈음에는 등산을 순수한 스포츠로 간주하는 알피니즘(alpinism)이 조선에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산악회’(1931년)나 ‘백령회’(1937년) 같은 산악 모임도 만들어졌다. 요컨대 민족주의적 산악 표상과 더불어 “건강 증진과 체위 향상을 위한 공간 혹은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산악 인식이 공존한 것이다. (309쪽)

 

반면 조선총독부는 “위생담론과 등산을 결부시켜 그 효용성을 널리 홍보”하는가 하면,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등산을 “대동양공영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신민의 의무”이자 “‘성전완수’와 ‘총후봉사’를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노동 후 위무’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들이 이러한 제국주의적 동원 수단으로서의 산악관을 답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상의 다양성과 그러한 인식이 제국주의적 비전과 만나는 여러 접점을 보이기 위해 필자는 “각계각층의 일본인 다수가 필자로 참여하여 34년간 발행된 최장수 종합잡지인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를 분석하고 있다. (310-311쪽)

 

여러 사료에 따르면 개항 이래 조선을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산이 훼손되고 황폐”하다거나 “화강암의 반석과 벌거숭이 산”이라는 식의 묘사를 남겼다. 나아가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들이 자라기도 전에 베어” 쓰는 행태로 인해 “조선이 일본에 비해 야만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312쪽) 조선의 산악에 관한 많은 기록들은 일본인들 역시 이러한 일반적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주거니와, 그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바로 ‘민둥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적 묘사’는 조선에 대한 ‘규범적 판단’으로 자주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종사원 양성소 교유였던 나니와 센타로(難波 專太郞)의 다음과 같은 글은 그 좋은 사례였다.

 

조선의 산은 수척하여 쌀쌀한 황태의 느낌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일본의 산은 매우 온기가 있다. … 조선의 산은 일본의 그것처럼 ‘정’은 아니다. ‘의’이다. ‘소곤거림’은 아니고 ‘침묵’이다. 혹은 또 ‘광명’은 아니고 ‘자포자기’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 자포자기의 그것이 아니라면 버려진 듯한 조선에서 미술은 발달하지 않았다. … 이것[을] 단지 악정(惡政)과 이웃 나라의 위협의 결과만이라고 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는지. (314쪽)

 

요컨대 나니와는 조선의 민둥산에서 느낄 수 있는 개인적 정취를 조선의 ‘문화적 낙후성’과 연결짓고, 이를 통해 그 낙후성을 정치사회적 요소에 기인한 것이 아닌, 어떤 자연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읽어내고 있었다. ‘민둥산’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산악이 일종의 ‘환경결정론’적 증거로 사용된 것이다.

 

조선의 미개 혹은 문화 지체에 대한 이러한 숙명론적 인식은 조선의 산악을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읽은 조선의 계몽주의자들과 매우 다른 인식이었다. 가령 이광수 역시 “우리 조상들이 송충으로 더불어 말끔 뜯어 먹고 말았다”며 조치원-공주 인근을 지나며 그 지역의 민둥산을 안타깝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악 인식과 별개로 그는 “전라도에 이르러 조선예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즉, 이광수가 보기에 “민둥산과 문화예술은 별개의 사안이며, 그런 까닭에 전자에 대해서는 교육과 식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세계에 대하여 조선인의 대기염”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6쪽)

 

 

고유한 장소감이 부재하는 휴양지로서의 산악

필자에 따르면, 일본인들 역시 조선의 산악을 관광차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그들의 시선은 산의 모양새나 풍광에 국한”돼 있었고, 그 “역사적, 문화적 자취”에 대해서는 그저 부차적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역시 나니와의 글을 살펴보자.

 

나는 조선으로 왔던 해의 가을, 칠팔 명의 지인과 단풍의 명소 소요산을 유람하였다. 나는 대단한 호기심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명물’이라든지, ‘명소’라는 것은 자칫 이름에 걸맞은 내실이 따르지 않는 것으로, 대부분은 누가 어떻게 했던 곳, 옛날 무엇무엇이 있었던 곳이라고 말하는 역사적 흥미에서 추회적인 서사시나 서정시를 부여하여 간신히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이나 소요산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산모양새는 정말로 기묘하였던 왕몽(王蒙)이라든지 예찬(倪瓚)의 필법으로 하면 그 산의 정신을 표출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어지는 귀봉신곡(鬼峯神谷)이 환명출몰(幻明出沒)하여 … 조선인이 이 선경에 선유(仙遊)를 제멋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317쪽)

 

이런 식의 묘사는 아래에서 볼 수 있듯 잡지 『개벽』을 이끌었던 차상찬(車相瓚)의 소요산 글과는 그 결이 달랐다.

 

경원선 동두천역에서 하차하야 동북으로 약 7리 가령을 걸어가면 근기(近畿)의 소금강이라 칭하는 청초수려한 산이 잇스니 이것은 서울의 보통학교학생들도 춘추의 원족을 흔히 가는 소요산이다. 이 산에는 옛날 신라의 명승 원효법사가 서식하던 소요사란 절이 잇섯기 따문에 인하야 이름한 것이니 그 절은 원효법사와 가티 벌서 그 자최가 살어저 업서진지 오랫지만 그 이름만은 아즉까지 그대로 남어 잇는 것이다. 수석도 절가(絶佳)하거니와 가을에는 특이 단풍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산중에는 수석풍광(水石風光)이다. … 단풍은 이 폭포로 하야 더욱 생색이 나고 폭포는 또 단풍으로 이채를 더하게 되니 이것은 가위 이 산의 쌍절이라 안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석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자미스러운 전설이 잇스니 관풍객의 한 한담거리로 잠간 소개하랴한다. (317-318쪽)

 

필자에 따르면, 차상찬의 글은 나니와의 글과는 달리, “소요산과 관려된 지명유래와 전설 등을 통해 소요산이 갖는 장소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장소감’의 유무는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산행 과정을 묘사하는 데서도 차이를 드러냈다. 단적으로 다음의 두 글을 비교해 보자. 첫 번째 글은 『조선풍속집』으로 유명한 이마무라 도모(今村鞆)의 글이고, 두 번째글은 문인 이은상의 글이다.

 

오후 네 시에 산정에서 약 일 리 아래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에는 큰 암굴이 있어 약 2,30인이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서 우리 일행은 그 암굴 속에 숙박하기로 했다. 나뭇가지를 잘라와 그것을 펴서 침상을 만들었다. 청려한 계곡물을 길어온 후 부근의 마른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붙여 탕을 끓이거나,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짓고 통조림을 열어 저녁식사를 유쾌하게 하였다. 일행은 열 명가량이었지만,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맥주나 위스키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며 요리실 등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감흥을 맛보았다. 밤이 되어 모포를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319쪽)

 

산상에 해가 저문다. 오늘밤 우리는 이 산상에서 지날 것이다. … 초원 한머리에 장막을 친다. 장막 머리에는 장작불을 집힌다. 저녁짓는 연기가 하늘로 한무더기 터저오른다. 마치 번제를 지내는 구약시대와 같다. ‘시나이산’ 상에 장막셋을 짓고 옛선지자 ‘엘리아’와 민족의 은인 ‘모세’와 성사기독을 모시고 싶다한 ‘베드로’의 말이 기억된다. 이 거륵하고 신비한 한라산상에서 나 또한 우리 역사의 선지자와 은인과 성사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 달은 밝고 불꽃은 여전히 타오른다. 나는 장막 문어구에 서서 마음의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야 비는 것이다. (319-320쪽)

 

이처럼 이은상과 같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한라산 산상에서의 모든 행위가 민족적 제의이자 배례”처럼 느껴졌다면, 이마무라 도모 같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명승 산악은 단순한 미적 완상과 휴양의 공간에 불과”했다. (320쪽)

 

 

제국적 욕망과 상상의 구상물로서의 조선 산악

장소감이 탈각된 듯한 일본인들의 산악 인식은 언뜻 ‘과학적’인 산악 탐구 활동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학성’은 제국의 욕망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1931년에 창단한 ‘조선산악회’를 주목하고 있다. 부족하나마 필자가 살펴본 일부 사료에 의하면, ‘조선산악회’의 주요 활동 목표 중 하나는 “지리, 지질, 식물학, 역사, 기후 등 여러 연구를 통해” 조선 산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나아가 간접적이나마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하나의 길”까지 제시하는 것이었다. (324쪽)

 

필자에 따르면, 이처럼 제국적 욕망에 포섭된 조선의 산악은 나아가 제국의 신화적 상상력에 포섭되기도 했다. 다시 나니와의 글을 살펴보자.

 

북한산에 몇 번이고 올랐다. 다다미를 몇 장이라도 깔 수 있는 바위 위로 나와서, 기복이 끝이 없는 민둥의 연산을 바라볼 때, 자기의 신체가 이대로 화석이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민둥산이 되어 나무 한 그루 없기 때문에 ‘세속의 기운’이라든지 ‘기름기’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전혀 ‘인간’이 살지 않는 세계인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단지 까닭도 없이 ‘고천원’을 연상한다. 천녀를 연상한다. 게다가 그것은 공상적인 것은 아니고, 사실과 같은 것이다. 지금, 자신은 경성에서 올라왔다. 이 산기슭에는 경성시가가 뻗어 있어서 몇 십만의 동포가 현재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틀림없는 일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에게 확실히 말해본다.

 

북한산에 오른 나니와는 ‘민둥의 연산’을 바라보며 이채롭게도 일본의 신화적 공간인 천상의 세계 ‘고천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연상은 “일본제국의 영토로서 일본 국민”, 즉 ‘몇 십만의 동포가 현재 살고 있는’ 경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이런 나니와의 상상을 “일본의 신화적 세계를 확장하여 적용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적 욕망이 투영된 확장된 영토 관념의 소산”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나니와의 제국의 상상은 불안한 것이기도 했다. 앞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편에는 무엇인지 그것은 거짓으로 생각된다. 너는 다만 그렇게 말하는 기분이 되었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꿈은 아닌가? 사실은 그런 동포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가?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의혹이 생겨 나의 눈에 비친 사회의 모든 모습과 사회생활에서의 나의 경험 그런 것들은 이미 몇 천년도 옛 일인 것 같이 생각된다. 세계 인류가 멸망하고 다시 몇 천 년인가를 경과한 무인의 섬일까 들판일까 산일까 모른다. 어쨌든 여기에 어느 곳부터라고도 없이 나온 것 같아서 ‘대단하’다. (327쪽)

 

나니와는 왜 갑자기 자신의 상상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까? 필자에 따르면 이 불안은 경성의 동포에 ‘섞인’ 조선인의 존재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비록 같은 일본제국의 영토에 사는 ‘동포’라 할지라도 ‘조선인’은 이질적인 제국 신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활’이라든가 ‘위생’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피지배자들, “소생하기 어렵게 시들고 … 위안이 되기 어렵게 노쇠”한 자들, 이들이 바로 조선인들이었고, 그런 미개하고 열등한 조선인을 나니와는 아무래도 동등한 ‘동포’로 인정할 수가 없었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328쪽)

 

이처럼 이 논문은 조선의 산악 하나를 두고도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 사이에, 그리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차원의 인식차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소개한 서유리 박사의 ‘위문화’ 연구(http://www.bookpot.net/news/articleView.html?idxno=1619)에서도 볼 수 있었듯, 식민지 연구가 더 다양한 소재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에 소개했듯, 논문의 필자는 산악에 관한 논문을 몇 편 더 쓴 바 있다.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참고할 수 있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박찬모 (2011), 「탐험과 정복의 ‘전장(戰場)’으로서의 원시림, 지리산」, 『한국문화이론과 비평』, 15(2)

박찬모 (2013), 「’전시’된 식민지와 중층적 시선, 지리산 – 1930년대 여행안내기와 지리산 기행문 재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3집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지호 리뷰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1층  |  대표전화 : 031)955-8898  |  팩스 : 031)955-2557
사업자번호 : 141-81-14390   |  등록일 : 2009.02.01   |  발행인 : 강성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성민
Copyright © 2018 리뷰 아카이브.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