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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보도사진과 저자의 문제뤽 들라리예의 사진에서 저자성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중심으로
강병준 리뷰어 | 승인 2017.10.04 08:13
들라이예, <제닌 난민 캠프(Jenin Refugee)>, 2002, c-프린트, 111x239cm, (c)Luc Delahaye

초보 사진작가인 나는 늘 사진에 '스토리'가 드러나도록 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요청하는 사람들 스스로조차 명료하게 알지 못하는 이 말의 뜻을 구체적으로 풀어 보자면, 사진에 중심이 되는 피사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도록 강조하고,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사진작가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게끔 해석의 여지를 좁히라는 의미이다. 더러는 '사진작가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내라'는 언어로 요청되기도 하지만, 종종 그들이 사진에서 찾기를 원하는 '의도'라는 것이 결국 작가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사진을 보는 사람의 욕망, 혹은 사진이 실리는 매체의 결정권자의 욕망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여문주 교수의 논문 「현대 ‘보도사진’에서 ‘저자성’의 문제 연구 - 뤽 들라이예의 사진을 중심으로」(한국예술연구(17), 2017.9)에서 "저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단어 "author" 혹은 "auteur"는 영화 및 타 예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라고 번역해도 비교적 문제가 덜할 듯하다. 마치 영화사에서 '작가성'의 논의가 발전해 온 과정처럼, 보도사진에서의 '저자성'의 논의는 시기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양상을 거치며 발전해 온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시기인 1970년대에 보도사진은 사건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효율성 면에서 컬러 텔레비전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던 보도사진은 사진에서 드러나는 사진가의 주관성을 부각하는 "저자주의(auteurism)" 전략을 택함으로써 미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는 마치 1950년대 영화가 감독을 작가로 격상시키고 영화에 예술적 주체를 등장시키는 작가주의 전략을 택함으로써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했던 것과 대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롤랑 바르트 등에 의해 주체와 작가 개념이 해체되면서, 문학과 영화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작가성이 재정의되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보도사진 역시 저자성 문제와 관련하여 또다른 전기를 맞는다. 뤽 들라이예를 비롯해 오늘날 "photoreporter-auteur(저자-보도사진가)"(혹은 '보도사진 작가'로 번역할 수도 있을 듯하다)로 분류되는 사진가들이 이 두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이들의 사진에서 저자의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이다.

 

들라이예, <미군의 탈리반 기지 폭격(U. S. Bombing on Taliban Positions)>, 2001, c-프린트, 112x238cm (c)Luc Delahaye

보도사진 문법의 전복과
예술의 자율성

들라이예,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Afghan Northern Alliance Troops)>, 2001, 컬러 프린트, 30x40cm

오른쪽 사진은 들라이예 자신이 2001년에 찍은 사진이다. 폭격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다급히 움직이는 군인들의 긴박한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담은 사진으로서, 들라이예가 극복하고자 했던 기존 보도사진의 문법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기존 전형적인 보도사진의 문법은 "정보시장이 요구하는 센세이셔널리즘에 대한 응답"으로 설명된다. "정보산업의 경제원리"는 사진으로 하여금 "언론의 가치와 신뢰도를 높이"는 수단으로서 복무하기를 요구하며, 이를 위해 "사진가가 사건 현장에 최대한 근접한 위치에서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사진적 수사"를 장려한다는 것이다. 가옐 모렐은 이같은 수사가 "오히려 리얼리티에 '시각적 변형(transformation visuelle)'을 가져오기 쉽다고 지적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프레임은 좁아지고, 실제 현장 상황의 많은 부분은 사진가의 의도와 판단에 따라 취사적으로 배제되며 특정한 피사체들이 선택적으로 강조되어 보여진다. 들라이예는 이같은 "사진가의 주관적 시선이 투사된 이미지"에 회의를 느끼고, 사건이 "정말로(réellement)" 어떠했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했다.

(사건의 '객관적 실체'를 '정말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 인식론적으로 가능한가에 관해서는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들라이예가 어떻게 다뤘는가에 관해서는 아래 단락에서 저자성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설명되거니와, 이 문맥에서는 "정말로"라는 수사를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단지 기존 보도사진의 문법에서 너무 상투적으로 개입해 온 특정한 형태의 주관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위 사진 <미군의 탈리반 기지 폭격>은 이를 위해 들라이예가 취한 전략을 보여준다. 카메라와 현장 사이의 거리는 극단적으로 멀어졌으며 프레임은 마치 영화 스크린이나 미술 작품을 보여주는 것처럼 좌우로 한껏 넓어졌다.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긴박감이나 속도감은 사라져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이같은 전복은 일차적으로 보도사진을 '보도'라는 실용적 목적("사용가치")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보도사진이 어느 정도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미적 가치의 측면에서만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효과, 즉 "자율성(autonomie)"을 획득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다.

사진이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전략과 관련해서는 예술 사진의 한 장르인 "타블로 형식 사진"과 들라이예의 사진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타블로 형식으로 분류되는 사진들은 커다란 화면에 작은 피사체들이 세밀하고 정교하게 배치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들라이예의 사진이 형식상 타블로 형식 사진들과 유사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지점이 된다.

그런데 타블로 형식 사진에서 피사체들이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며, 그럼으로써 관객과의 소통의 가능성조차 봉쇄한 채 피사체들간의 내재적 관계로부터만 의미를 생산하려 하고 바로 그 사실을 통해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에 비해, 들라이예의 사진은 관객을 사진으로 가까이 끌어들여 관객이 사진 속 피사체를 자세히 관찰하게끔 유도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모더니즘 미술사가인 마이클 프리드는 지적한다.

이는 현실의 역사적 사건들을 피사체로 삼는 보도사진이라는 장르의 태생적인 특성 상 사진 속의 세계를 사진 밖의 현실 세계와 분리해 고립된 세계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관련있을 수 있다.

들라이예는 타블로 형식 사진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예술적 자율성을 추구했고, 이는 다른 예술 사진과 구별되어 보도사진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들라이예가 예술적 자율성을 획득한 방식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들라이예의 사진에서 저자성의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들라이예, <밀로셰비치 재판(The Milosevic Trial)>, 2002, c-프린트, 245x111cm, (c)Luc Delahaye

보도사진 예술에서의
'작가의 죽음'

들라이예, <초상/1(Portraits/1)>, 1995,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x15cm (c)Luc Delahaye

들라이예 사진에서 감행된 문법 전복의 또다른 효과는 기존의 보도사진에서 지나치게 전면으로 부각되어 있었던 사진가의 존재가 후퇴했다는 것이다.

파리의 노숙인이 들라이예의 요청에 따라 즉석사진 부스에 들어가 직접 기기를 조작해 촬영한 오른쪽의 사진 <초상/1>에서, 모델은 시선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당당하게 자신을 주체로서 드러낸다.

또한 위 사진 <밀로셰비치 재판>에서는, 일반적인 보도사진에서 크게 부각되어 나타났을 중심 인물은 배경 뒷편에 조그맣게 보이고 있으며, 반대로 일반적인 보도사진에서는 가능한 한 배제되었을 인물과 사물들이 오히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지 않고 반대로 극단적으로 멀리서 풍경과 함께 조망한 이 글 최상단의 사진 <제닌 난민 캠프>도 같은 맥락에서 참고할 만하다.

들라이예의 사진에서 특징적으로 쓰이는 큰 사이즈와 좌우로 넓은 포맷의 화면에 관해, "캥탕 바작은 ... 실재를 중립적으로 포착하도록 하는 도구이자 이야기의 구조를 열어두려는 의지로 해석한다. 사진가의 주관적 시선이 '프레이밍'해 잘라낸 현실의 파편이 아니라, 사진가의 중립적인 거리가 '프레임' 안에 현실의 총체를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중립적', '현실의 총체' 등의 단어들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다뤄지는 것이 가능한 개념들인가 하는 반문이 제기되면서 자꾸만 걸리적거릴 수밖에 없다. 논문은 김화자 교수를 인용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개념을 빌려 이같은 단어들의 사용을 정당화한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현상"을 지시하는 것이 "사진의 '존재론적 지표성'"이기 때문에 "그 의미의 해석은 사진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수용자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진은 그 자체가 모호한(불확실하고 불투명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 관해서 우리가 접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현상들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보도사진에서는 사진가가 현상을 해석하고 취사선택해서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현실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이 지워져버리고 마치 현실이 명료하여 해석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반면 들라이예의 사진에서는, (비록 여전히 현실 그 자체의 객관적인 전달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현실의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속성만큼은 사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또한 대상에 대한 개입이나 해석을 최소화하면서 "대상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하려 시도하는 사진가의 작업 방식은 사진가로 하여금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맺게 한다. 논문은 이같은 방식이 사진가로 하여금 실재에 대해 "순수하고 직접적인 관계에 이르"도록 한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사진가가 이처럼 사건과 거리를 둠으로 인해 "사건에 대하여 감상적이거나 지적인 개입이 들어설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 보다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술적 창작물을 생산해내는 원천이면서 그 작품의 의미를 규정할 독재적 권위를 가진 "유일하고 동일한 사람"인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그 자체 기원이 없는 수많은 다양한 글쓰기들('문화들')이 결합하고 충돌하는 다차원적 인용의 공간"이고, "텍스트의 의미는 ... 텍스트와 독자 사이 대화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되도록 피사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커다란 화면에 많은 피사체들을 평면적으로 담음으로써, 들라이예는 수많은 관객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거리와 위치에서 사진의 서로 다른 부분에 주목하여 다른 감상 과정을 거쳐 수많은 서로 다른 의미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다양성의 여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한다.

들라이예의 작업 방식은 사진의 의미와 해석이 사진가에 의해 독점될 수 없고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에서 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작업방식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이를 모호함, 불분명함, 어려움으로 받아들여 부정적으로 평가할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때문에 더 능동적으로 사유하며 의미를 생산해내는 주체로 성장하도록 고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개념적 총체성과
중의적이고 중층적인 저자

논문은 이런 측면 때문에 들라이예의 사진이 "총체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총체성은 사건에 대한 정보 제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라이예의 사진이 드러내는 현실의 존재론적 속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 보도사진에서 프레이밍을 통해 잘라내 버리곤 했던 바깥 영역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들라이예의 사진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효과는 현상적인 사건에 대한 더 많은 정보 제공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보도사진에서 지워지고 감춰졌던 현실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이 실재가 갖는 여러 층위, 여러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들라이예의 사진은 총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논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들라이예가 결국 "저자를 후퇴(제거)시킴으로써 저자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진이나 예술에서 작가의 주관성이 진정으로 제거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생각할 때, 들라이예가 한 일은 보도사진에 있어서 저자성의 문제를 다루는 들라이예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방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독특함을 통해서 들라이예라는 작가의 고유함은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해서 들라이예는 보도사진의 차원에서 저자를 '제거'했지만, 저자는 정말로 사라졌다기보다는 예술의 차원으로 이동하여 예술적 작가로 변모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들라이예는 사건을 분절하여 독자에게 사건을 특정한 시각과 입장에서 보도록 강요하는 권력으로서의 '보도사진의 저자'를 제거하려 시도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수법을 통해 고유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예술적 주체로서의 작가'로 드러나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함께 읽어 볼 만한 논문

김화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표현론에 나타난 형태와 상징의 관계」,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40집, 2009.2

김준기, 「영화의 작가에 관한 연구(1)」, 『씨네포럼』 제1호, 1999.5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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