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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기술사에서 식민지 유산 다시 보기민족의 과학에서 정부의 과학으로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7.09.29 13:46

근현대 한국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이해할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가령, 식민지 유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그것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있는지 등의 질문이 있다. 이는 한국과학사 영역에서도 중요한 질문이었다. 김근배의 논문  「식민지 과학기술을 넘어서」 (『한국근현대사연구』 , 58, 2011년)은 일제의 유산을 다룬 한국과학기술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정책, 교육, 연구 등을 포괄하는 국가적 과학기술시스템의 형성과 과학자 사회 두 측면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식민지 통치체제의 일부로 만들어진 근대 과학기술의 뒤틀린 형성

저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과학기술을 “일본제국의 과학기술”, “식민정부의 과학기술”, “조선민족의 과학기술”이라는 3가지 지형으로 나누어 살펴봐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일본제국의 과학기술’은 제국의 건설과 운영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형성된 과학기술이고, ‘식민정부의 과학기술’은 조선지역을 대상으로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학기술이며, 마지막으로 ‘조선민족의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개선과 증진을 지향한 과학기술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근대 과학기술이 권력관계를 반영하여 사회 속에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상황에 있던 조선의 과학기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항목이었다. (257쪽) 각 영역은 때로는 분리되기도 때로는 중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시 시기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의 과학기술’을 교육받았지만 이들이 졸업 후 활동하는 영역은 ‘식민정부의 과학기술’ 또는 ‘조선민족의 과학기술’이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조선 시대 근대 과학기술의 근간이 일부 형성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 이 시기 경성제대 이공학부, 경성고공 등과 같은 체계적인 제도의 구축을 통해 과학기술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세부적으로 분화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독립적인 전문 집단으로 대두되었다. 저자는 이 시기 조선인들의 과학기술이 꾸준한 성장을 하였고 이러한 성장이 상당 부분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이 있음을 인정한다. 

경성제대 사진(위키피디아)

그러나 저자는 위에서 구분한 3가지 영역 간에 분명한 차별성이 내재되어 있는 점을 지적하며 조선인의 과학기술은 상대적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영역과 더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국가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근대 과학기술을 국민적 필요와 연계시킬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의 과학기술은 “비록 근대적 모습을 갖추어 갔더라도 그 대부분은 국민국가의 발전이 아닌 식민이 통치체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 (259쪽) 또한 과학기술활동의 실질적인 주체가 일본인이었다는 점 역시 중요한데,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은 일본인들 연구의 보조적 역할에 그칠 뿐 대부분의 핵심 기술은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의 관심사에 따라 파편적으로 과학기술 지식을 습득하거나, 일본인들이 기피했던 광산, 측량 기술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즉, 일제의 과학기술 정책은 조선인들이 근대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격려하는 형태가 아닌 식민지 통치를 위한 목적 하에 진행된 정책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비록 이 시기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이나 고등교육, 시험연구 등의 제도적인 기반이 구축되어 근대적 과할기술 제도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나 정책-교육-연구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시스템 구축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의 과학기술이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이 한국의 근대 과학기술 발전에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학기술은 한국 과학기술의 일부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제약하고 뒤틀리게 만든 측면도 강하게 지녔다. 그러므로 한국의 과학기술은 해방 후에 기존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발전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63쪽) 

과학자 사회 역시 당시 과학잡지와 과학도서 등이 발간되고 대중적 과학보급운동이 일어나는 등 다양한 과학기술활동이 동원되었으나 이를 주도하는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의 수가 충분하지 못했고, 이들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과학자사회의 조직에까지 미처 도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역적 성격이 강하고 특별한 실험 장비 없이 연구가 가능한 박물학 영역에서 과학자 조직이 만들어졌지만 이들의 활동 역시 크지 않았고, 기업에서 일한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업이 제한되었다. 이 시기 과학기술자들의 연구는 국가의 발전과 분리되어 개인의 관심사로 치부되어 지원은 커녕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0년대 해방 이후:
국가적 과학기술시스템의 창출

해방은 과학기술 분야에 새로운 변화를 야기했다. 과거 상당 부분의 발전을 일본에 기대어 이루었던 만큼 해방되었다 하여 일본이 이끌었던 식민지 과학기술로부터 조선이 완전히 독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해방 후 필요에 의해 일제의 유산을 존속시켜야 하는 현실은 사실이나 일제 과학기술의 유산이 그대로 존속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을 들어 평가하기 보다 그러한 유산이 차지하는 위치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국가적 과학기술시스템의 창출”이었다. (265쪽) 그는 과거의 ‘민족적 과학기술’은 그대로 이전되었고, ‘식민지 과학기술’은 일부 전유되고 일부 변형되는 과정을 통해 해방 이후 과학기술 시스템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과학기술계는 독립국가에 걸맞는 과학조선 건설을 위해 우선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시스템의 구축을 목표하였다. 이 요구가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위한 당시의 변화는 주목할만한 것이다. 

당시는 ‘교육혁명’의 시기로 불리울 만큼 고등교육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고, 서울대를 포함한 새로운 대학들이 여럿 세워져 과학기술 관련 여러 학과들이 다양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연구소의 개수 역시 급증하였는데, 중요하게는 1950년에 세워진 국방부과학연구소가 기초과학과 공학기술을 포괄하는 종합연구소의 성격을 띄며 우수한 연구진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종합연구소로 발돋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중앙시험소와 지질조사소 등의 연구소의 위상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과학자 사회 역시 해외 유학 경험을 쌓은 중견 과학기술자들과 한국에서 뛰어난 연구성과를 낸 한국의 과학기술에 토대를 두었던 과학자들이 새로이 자리잡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인력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체제 도입과 정부친화적 과학자 집단의 형성

1961년 군사쿠테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경제정책의 중요한 일부로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특이할 점은 과학기술이 경제발전의 일환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방향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경제적 번역’ 작업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는 “과학기술시스템이 행정, 법, 연구, 교육 등을 포괄하는 형태로 그 모습을 갖추었”던 시기로 이러한 발전이 정부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발전 방향이 경제개발에 직접 기여할 수 있는 산업기술 분야에서의 연구개발에 치중되기도 하였다. 

우선, 1960년대에 이르면 대부분의 일제 유산은 소실되었다. 과거 남아있던 물질기반은 오래되어 더이상 쓸모없게 되었고, 지식의 내용 역시 일본이 아닌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며 과거의 지식은 도태되었다. 또한 과학기술과 경제와의 연관성이 강조되면서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커지며 이에 맞게 과학기술의 제도와 인력들이 재편되었다. 

1963년 기술관리국에 이어 1967년 과학기술처가 독립적인 정부 부처로 설립되며 과학기술 전담 행정기구가 등장, 국가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방향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포함하여 과학기술 장기발전계획 등이 만들어졌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기술진흥법도 제정되는 등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과학기술의 청사진을 그려보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과거의 연구 방향에서 벗어나 산업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또한 이 시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세워졌고 이후 KIST를 필두로 한 여러 연구소들이 결집된 대덕연구단지나, 1970년대 이후 세워진 정부출연연구소들 역시 이 당시의 결과물이다. 정부 주도의 연구소들이 대거 설립됨에 따라 여기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를 맞추고자 산업적으로 유용한 전문인력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AIS)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부터 기존 대학들 역시 교육 뿐 아니라 산업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연구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에서 ‘제도혁명’이 일어난 때로 이를 두고 한국 특유의 현대적 과학기술시스템이 드디어 확고하게 갖추어졌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275쪽) 

1960년대는 과학자 사회가 성숙한 형태로 안착된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과학자들은 모여 실용적 연구가 추진하고,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학문 분야별로는 전문 학회가 등장하고, 정기 학술대회가 개최되며 학술저널에 연구 개제가 증가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학회 설립의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이 시기부터 과학기술자들의 교육과 연구 활동이 학술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정부에 과학자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한편, ‘정치권력의 과학기술 동원의 매개체’로 역할하였다. 

저자는 1960년대는 특유의 한국적 성격을 띈 과학자 사회가 형성된 시기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를 거쳐, 미국유학 출신의 과학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고, 기초 및 순수과학보다 응용과학이나 공학기술 분야의 과학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또한 과학자들은 독립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 정부에 기대어 정부 친화적이고 의존적인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전문지식을 가진 우월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기 또한 이 때이다.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오면 더이상 식민지 일제 유산은 보기 어렵게 된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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