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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慰問’이라는 식민지 유산일곱 점의 위문화에 담긴 전시 아동 규율의 흔적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7.09.20 22:09

얼굴도 모르는 국군장병에게 감사의 ‘위문편지’를 쓴 일은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을 하나의 집단 기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위문의 문화’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수년 전 미술사학자 최열은 새로 구입한 구한말 의병의 그림 뒷면에서 우연히 일곱 점의 그림을 발견하였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 그림들은 일제강점기 말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그린 것으로 “전쟁하는 군인과 병기들”을 담은, “학교에서 황군(皇軍)을 위해 그리도록 한 위문용 회화”였다. (258쪽) 현재 확인된 유일한 일제강점기 위문화로 추정되는 이 일곱 점의 그림은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좋은 단초를 제시하는 귀한 사료이다. 서유리 박사의 논문, 「‘위문화(慰問畵)’를 통한 전시(戰時) 아동 규율 -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 위문화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2집, 2016년 하반기)는 이 일곱 점의 위문화를 여러 사료와 비교, 대조하며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한국 위문 문화의 한 단면을 역사적으로 더듬고 있다.

 

그림1. 5학년 강수원 그림2. 4학년 김숙현 그림3. 5학년 서수관

 

그림4-1. 6학년 이만수 그림4-2. 이만수 위문화 뒷면. 학교명, 직인과 학년, 이름, ‘위문화’ 등이 표기돼 있다.

 

그림5. 4학년 이창원 그림6. 5학년 정홍모

 

그림7. 작자미상

 

‘위문’ 제도의 짧은 역사

“후방의 국민이 전방의 군인을 생각하며 그 수고와 고통을 위로하고 즐거움이 될 만한 것을 보내준다는 ‘위문’의 제도”는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국가에 대한 순종의 마음을 심어주는 정신적 규율과 동원의 방편”으로 오랫동안 활용됐다. (263쪽) 필자에 따르면 이러한 한국 위문의 제도는 다름 아닌 일본에서 이식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이미 “전쟁터에 파견된 군인들에게 위문문을 보내는 활동”이 이뤄졌다. 소학교 학생들은 ‘위문장’이라 불린 위문편지를 써야 했고, 지역 교육회는 “그림과 글을 같이 묶어 책처럼 만든” ‘위문첩’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출정하는 병사들에게 죽어서라도 천황과 국가를 위해 분투할 것을 강요하는 이른바 ‘단체협박장’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 이러한 위문문 작성을 포함한 ‘위문의 문화’는 강제병합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도 지속됐다. 일본 ‘애국부인회’가 조선인 여성을 동원하여 만든 ‘위문대’는 여러 “물건과 위문문, 위문화 등을 모아서 넣어 보내는 주머니”를 일컫는데, 이런 위문대를 참전 군인들이나 국경수비대에 보냈다는 신문 기사들이 1910년대 중엽 이후 여럿 발견되기 때문이다. (263-264쪽)

중일전쟁이 시작되면 이런 위문의 제도는 “총독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937년 이후 “매년 수십 개의 위문대, 위문문, 위문행사에 관한 기사”가 발견된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위문의 주체로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1937년 중엽 “전시 정보와 국책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중앙정보위원회’”가 시행한 ‘시국강조 대운동’은 일제가 초등학생을 위문 활동에 어떻게 동원했는지 잘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1937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전조선 각 초등학교에 아동들로 하여금 위문대 한 개 또는 두 개씩 만들게 하는데 위문의 금품에 치중하는 것보다도 학동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게 하여 시국인식을 철저히 주입”하는 것이 당시 위문 활동의 취의였다. (265쪽)

식민지적 조건상 더 강조된 듯한 “정신교육적 차원”은 위문대 제작 뿐 아니라 위문문 작성이나 위문화 그리기에서도 두드러졌다. 위문문 작성은 “국어(일본어) 교육도 겸하여 ‘황군에 대한 감사의 관념과 시국인식의 철저, 애국심의 향상’을 위해서 전시 기간 내내 장려되었고 빈번하게 실시”된 듯한데, 그 중요 사례로는 “징병제가 시행된 1944년에 관변단체인 녹기연맹(綠旗聯盟)에서 초등학생들의 위문편지 형식의 글을 모아 만든 작문집『徵兵の兄さんへ(징병 가는 형님에게)』”가 있었다. 이 작문집의 가장 큰 특징은 “본격적인 징병을 앞두고 있는 조선인 ‘황군’”이 그 수신인이었다는 점이다. (265-266쪽) 조선인에 대한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나온 이 책의 내용은 과연 어땠을까? 필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반도인도 내지의 군인들과 똑같이 적을 격파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라는 반복적인 문구들과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이 한 몸을 천황과 국가[君國]에 바치겠다.”라는 결심은 창씨개명한 조선인 학생의 이름과 더불어 최소한 제도적 차원에서는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성공적으로 탈바꿈된 초등학교 아동의 규율화 된 내면을 드러낸다. (266-267쪽)

 

영광공립보통학교 위문화의 특징 -
일본 위문화와 비교

다른 위문 활동에 비해 위문화 그리기는 가장 덜 선호된 활동이었던 듯하다. 현존하는 사료가 거의 없는 이유도 그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정황 증거로 볼 때 1937년 말경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영광공립보통학교 아동 위문화 일곱 점은 그런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렇다면 그 그림들에 드러난 이미지는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서두에 제시한 그림들과 위 표에서 알 수 있듯, 우선 학생들은 “비행기와 전함, 폭격하는 비행기, 말을 탄 기병, 총검을 들고 돌격하는 육군, 기관총 쏘는 군인, 교차게양한 일장기” 등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에 따르면, 이러한 “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여러 매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익숙한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었다. 물론 각자의 흥미에 따라 더 두드러지는 대목들도 있는데, 특히 비행기는 가장 자주 반복된 모티브 중 하나였다. 이는 당시 일제가 “소년 비행병을 양성”한 것, 그리고 여러 성인용 매체 이외에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들이 “어린 남학생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기사”를 관련 이미지와 함께 자주 실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이다. (269쪽) 가령 아래 그림11은 “다색의 이미지가 풍부한 그림 잡지로 전시 아동의 정신교육을 시행”한 『월간 소국민』에 실린 여러 이미지 중 하나이다. (270쪽)

 

그림8. 『조광』(1944.9) 표지 그림9. 『반도지광』(65호, 1943.5) 표지

 

그림10. ‘알류샨에 상륙하여 군함기 아래 진격을 준비하고 있는 육전대(陸戰隊)’, 『황민일보』 (1942.7.2.) 『황민일보』는 “한자에 후리가나를 단 쉬운 일본어로 1942년부터 발행”한 신문인데, “소학교에서 필수적으로 구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11. 『월간 소국민』의 내부 사진 (1944.8)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37년 말경 조선 전역에 걸쳐 학생 위문화 그리기가 시행된 듯하다. 영광보통학교 학생들의 위문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그려진 것인데, 기사에서 확인되는 그림 중에는 훨씬 더 극단적인 것도 있었다. 바로 ‘피로 그린 일장기’였다. 1937년 12월 22일『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경상북도 영양군의 보통학교 학생들 … 4학년과 5학년의 남범진, 박찬조, 김춘상 등 여러 조선인 학생들은 서너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일장기 혹은 ‘대황폐하 만세 출정황군 만세(大皇陛下 萬歲 出征皇軍 萬歲)’ … 등의 글을 피로 그리거나 써서 보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육체를 갈라 피를 내어 국가 상징의 기호를 그림으로써 신체와 마음을 이에 복종시키는 기이한 규율화를 통해서 최초의 국민되기를 체험”한 것이다. (273쪽)

 

영광보통학교 학생들의 위문화가 지니는 특징은 비슷한 또래의 일본 국민학생들이 그린 위문화와 비교할 때 더 잘 드러난다. 가령 나가노현 이다시에 있던 오쿠보 국민학교 4학년 여학생 나가야마 히사코(永山久子)가 그린 위문화(그림12-1, 12-2)를 보자. 이 위문화들은 “같은 시 출신의 시노다 다카시(篠田隆)라는 불과 19살의 소년 비행병에게 전달되었고, 비행훈련 중 사망한 소년의 유품으로 보존”된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학교에서의 제식 훈련 장면을 그린 듯” 여러 명이 줄지어 걷고 있는 다리만을 강조한 그림과 “목조로 지어진, 학생 자신이 다니는 국민학교의 모습이 큼직하게” 그려진 그림 두 점 모두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고 있지 않은 일상의 모습을 담은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일상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전투의 장면을 그린 조선학생의 그림들”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274-275쪽) 이 차이를 필자는 이렇게 읽고 있다.

… 이 차이는 무엇보다도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아동이라는 차이와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 자신의 고향 일상의 풍경은 이미 전투의 환경에 노출된 황군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일상풍경이 일본인 황군에게 실질적인 위로를 줄만한 소재일까. 무엇보다도 위문화란 조선인 학생들에게 전시 군인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마음을 심어주도록 만드는 학생 정신교육의 목적이 컸다. 따라서 제국군에 대한 경외감을 강화하는 소재가 훈육자의 입장에서 선택되기 쉽다. 말하자면, 조선 아동의 위문화들은 보내지지 않는 위문화, 근본적으로 위문이 될 수 없는, 위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위문화였던 것이다. (275쪽. 강조는 인용자.)

 

그림12-1, 12-2. 나가야마 히사코의 위문화

필자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국책사업으로 인쇄 발행된 위문화”, 즉 상품화된 위문엽서의 이미지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276쪽) 그렇다면 이렇게 일상성이 강조된 그림들이 ‘국책사업’의 결과물에도 선택된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필자에 따르면 일제는 “이 시기에 아동적인 천진난만함이 위문편지나 위문화에 드러나는 것을 권유했다.” 이는 “순진하고 지극히 감수성이 풍부한” 아동들이 “가정과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특히 “사랑스러운 소학생의 천진무구한 위문문(화)(可憐な る小學生の無邪氣な慰問文)”, 구체적으로는 “가식이 아닌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것, 천진난만한 것, 그 가운데 고향의 소식을 포함한 것” 등이 바람직하게 여겨진 반면, “지나치게 꾸미고 구체적 내용이 없는 것, 교훈이 많거나 격려하는 것” 등은 지양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277-278쪽)

이렇게 볼 때 영광보통학교 학생들의 위문화는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차이를 전쟁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된 방식의 차이와 연결짓는다.

일본에서 전쟁이란 아동부터 성인까지 오로지 강압적인 정신교육의 차원에서만 강요되어, 그것을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도 없이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 전체가 묘한 열기와 흥분 속에서 승리를 위한 자발적 매진을 다투는 가운데, 전시경기가 가져다준 상업적 가능성은 최대한 활용 되었고, 전쟁이 상품화되고 상품은 전쟁을 이용했다. 이러한 점은 오로지 총독부를 통한 전시 동원과 정신교육에 노출되었던 조선인들, 그리고 조선인 아동들이 겪게 되는 상황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278쪽)

 

그림13. 일본 내각정보부에서 발행한『사진주보』 220호(1942.5.13)에 실린 황군위문 그림엽서 이미지들. 전쟁이나 군대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이미지들이 아홉 점 중 여섯 점에 이른다.

 

‘위문 문화’라는 식민지 유산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위문 문화’는 상이하게 사용됐다. 보내지지 않은 영광보통학교 학생들의 위문화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조선에서 ‘위문’은 수신자로 호명된 황군을 실제로 위문하기보다, “어린 아동에게 군대/국가”라는 “존경과 감사를 바쳐야 하는 위력적이고 권위적인 존재”를 “각인”하는 “규율 기제”로 작동했다. (279-280쪽) 그러나 그 기제는 얼마나 철저히 작동했을까?

서두에서 지적했듯 이러한 위문 문화는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필자의 지적처럼, “식민지 아동에게 요구되었던 위문의 제도가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다시 반복될 때 그 대상은 달라졌으나 방법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80쪽) 그렇다면 “무능한 권위주의와 포악한 자본의 유령들이 가득한 21세기의 한국”의 오늘은 어떤 ‘위문’을 요구하고 있을까? 필자가 논문의 결론에서 던지는 두 가지 무거운 질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강명숙 (2015), 「영화 <수업료>를 통해서 보는 전시체제기 교육」, 『한국교육사학』, 37(2)

정근식 (2009), 「일본 식민주의의 정보통제와 시각적 선전」, 『사회와 역사』, 82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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