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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을까?베트남전 파병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정권의 집요한 시도를 중심으로
오제하 리뷰어 | 승인 2017.08.03 09:38

흔히 우리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 68혁명이 떠오르고 영화 ‘7월 4일생’과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이 그리는 베트남 전쟁은 (보다 정확한 용어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불린다. 이 전쟁은 흔히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정부군, 남베트남의 농민 게릴라, 그리고 주되게 남베트남에 대규모 군대를 보낸 미군의 전쟁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한 나라 군대가 더 끼어든다면, 그것은 한국군이다. 한국 정부는 1965년 즈음부터 1973년 철군까지, 베트남에 연인원 약 30만 명의 군인들을 파병한다. 왜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그리도 많은 병사들을 보낸 것일까?

최동주「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동기에 관한 재 고찰」(1996, 『한국정치학회보』 30(2), 267-287)은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동기에 대해 경제적인 이익을 핵심으로 보면서, 동시에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전에 대규모 파병을 매우 집요하게 미국에 요구해왔다는 점도 밝힌다.

특히나 한국 정부의 자발적 참전의사가 강조되어 있고 그 부분을 주되게 다루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파병 동기를 경제적 요인으로 보는 시각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이 미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관점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만큼 (1996년에 나온 이 논문은) 지금도 참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 2대본중(2대대, 본부 중대)의 군인들(출처: 위키백과)

기존의 연구들은 한국이 베트남전에 왜 참전했는지에 대해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압력에 굴복했거나 이념적 동질성 등을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필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경제적 유인이라 주장한다. 당시의 한국 지도자들이 경제적 동기를 갖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기존의 주장들은 경제적 이득을 그저 월남 파병의 결과로만 보았지 파병이 애초에 삼았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우선 방법론적인 보완을 하고 싶어 한다. 필자는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밝히는 데 있어 미시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의 미시적 접근이란 당시 한국이 어떤 성격의 국가였고, 한국의 정책 결정 집단은 어떤 성향을 가진 집단이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구체적으로 당시 외교문서 분석과 당시 정부 관료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미시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 기념 도서관, 케네디 기념 도서관과 정부자료보관소 등의 자료를 통해 한국의 월남 파병 과정과 그 목표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한국이 왜 월남 파병을 하고 싶어 했으며 월남 파병을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왜, 어떻게 미국의 동맹국들은
전쟁 개입을 했을까

당시 미국의 우방국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보면서 계산기를 두들겼다. 참전국가들 대부분의 참전 동기는 자발적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의 압력이나 이념적 동질성에 기반해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선 베트남에 파병한 미국의 우방국들 대부분이 자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실제적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필리핀이나 태국은 병력을 아주 적게 파견하고도 미국으로부터 군사, 경제 원조를 받아냈습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대체로 자국의 안보와 관계없이,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원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베트남전을 이해했다. 물론 호주의 경우, 베트남전을 확대해석해서 자국의 안보 위협으로 느끼고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결속력이 보다 강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소련과 쿠바가 경제적 유인을 가질 때 함께 칼을 꺼내 들었다. 이를 보았을 때, 냉전 시대 양극 중심의 동맹 체제가 과연 이념적 동질성에만 의존한 것인지 필자는 의문을 던진다.

한편 당시의 한국이라는 국가와 그 정책 결정 집단의 성격도 살펴야 한다. 필자는 당시 세계를 소위 ‘신중상주의’ 체제에 있었다고 본다. 신중상주의란 국가의 경제, 정치 외교 정책이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지향한다는 의미이다(중상주의는 국가의 보호아래 무역, 수출 등을 함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부가 어떻게 국가 경제 정책을 주도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은 이를 시행해나가는 개발 지향국가였다. 즉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 경제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체제였다. 이를 주도한 것이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라는 점을 필자는 강조한다. 중상주의로 무장한 그들은 결국 권위주의적, 개발 지향적인 정부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 드라이브를 추진했다는 것이다(포스코 경영연구소 소장인 이 논문의 필자는 박정희 정권 치하 경제성장의 과정에 대한 가치판단은 잘 보여주지 않고 있다).

 

베트남 파병의
거시적인 배경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적 환경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실업률은 높고 농촌경제는 붕괴해갔으며 산업 생산기반은 취약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 경제 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고 필자는 설명한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의 경제 원조는 한국 총수입의 7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원조마저 차감되었다. 국제 신용도도 없는 상태라 차관 도입도 힘들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는 실용주의로 무장한 서구 유학파 인력들을 중용한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참전하게 될 베트남을 돌파구로 삼게 되었다.

첨예한 논점이기도 한데, 당시 한국의 안보 환경은 얼핏 불안정해보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한국은 ‘신 전략 정책(New Look Strategy)’이라는 전략 핵 봉쇄선의 영향 아래 있었다. 군사원조도 멈추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문제가 악화되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도 미국에게 중요해졌다. 게다가 당시 한일 외교 정상화를 미국이 요구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서 한국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중지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대가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미국은 인도차이나를 놓고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우방국들과 경쟁을 벌여왔다. 1960년대 초반 라오스 위기 등을 겪으면서 오히려 국제관계에서는 더 많은 파탄을 겪어야 했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 파키스탄 등의 국가들도 중국과 동맹을 결성하는 등 미국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짐에 따라, 한국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미국의 우군이 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파병 의지

이 논문이 리뷰어에게 섬뜩한 인상을 줬던 것은 당시 박정희 정부의 관료들이 매우 집요하고 끈질기게 월남전 파병을 성사시키려 하는 모습이었다. 1961년 박정희는 케네디 대통령 취임을 축하한다면서 워싱턴을 방문,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군 파병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케네디는 베트남 직접개입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고, 한국은 미국을 배제한 채 남베트남과의 직접 외교를 시도하여 미국의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1964년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군사 개입이 사실화되면서, 한국은 파병을 위한 모든 외교적 노력을 시도하였다.

리뷰어의 설명을 잠시 덧붙이면, 당시 미국이 원하던 것은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의 깃발이었지 대규모의 전투 병력이 아니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자국의 안보를 위한답시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시 세계 최약소국이나 마찬가지인 베트남에 수십만 명의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여러 의문점을 낳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계급은 베트남에 대규모 파병을 해서라도,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끝장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남베트남에서 빈농들의 계급투쟁이 폭발하거나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군대를 끌고와 지엠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할까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1950년대 이후 미국에서 자신들이 짓밟아놓은 공산주의자들과 강력한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가 다시 활개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소련과의 경쟁에서도 밀려선 안 되었다. 자세한 분석은 조너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책갈피, 2004)을 읽어보라.

그래서 미국 혼자서 날뛰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들도 함께 나선 일이라는 점,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란 포장을 미국은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동맹국들까지 나서는 것을 미국은 부담스러워했다. 애초에 첨단무기를 가진 미군의 손으로도 얼마든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기간 중 매우 초기의 일이다.

반면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원하고 있던 상징적 지원을 넘어서서, 대규모의 전투병력 파견을 원하고 있었다. 1964년 초 국내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한국 정부는 전투 병력을 대규모로 파견하겠다며 미국 측에 허가를 요청한다. 전투병 파견에 부담스러워하는 미국 측에, 한국 외교부는 정규병이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전투병을 파견하면 되지 않냐는 의견도 제시했다. 박정희 정부가 여기 집착한 이유는 정규 병력을 국외로 이동시킬 때 발생할 공백을 방지하고, 실직 상태의 전역 군인들을 파병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외화획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1965년 2월을 전후로 베트남 전황이 더 악화되면서, 미국은 한국군을 가용병력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미국은 한국군과의 협의도 없이 독자적인 계획도 세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 때 박정희 정권은 오히려 입장이 조금 바뀌었는데, 한 일 외교 정상화가 성사되어 8억 달러를 확보,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미 군사, 경제 원조를 지속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황이었기에, 한국 정부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국은 자국의 실업률을 낮추는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외자 지원 등 미국의 협조를 요구한다.

물론 여기서 한국정부는 미국이 베트남 특수로 얻는 이익을 한국 측에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국은 전투 병력을 파견하기 앞서 ‘한국-베트남 경제 협력위원회’를 설립하고 노동자들을 남베트남에 보내 베트남 특수를 직접 챙기기도 했다. 한국 측은 전투병력 파견에 대해서는 답변을 유보하였는데, 전투병 파견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한일 외교 정상화와는 별개로 이익을 누리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한국경제는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어떤 것들을 얻었을까? 직접적인 외화 수익만 약 10억 달러, 직⦁간접적인 외화 수익은 도합 약 50억 달러 정도 된다는 보고도 있다. 박정희 정부와 여러 언론들은 이런 숫자들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을 들이대며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려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한국은 이 전쟁에 참전한 8년 동안 5,000여 명의 사망자, 1만 명이 넘는 부상자,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고엽제 피해자 등을 낳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다는 ‘한강의 기적’은 이 사람들의 목숨 값에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계산에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학살당한 수많은 민간인들과 민족해방투사들의 목숨 값도 더해져야 한다.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논문

Han, Sung-Joo, 1978, 「South Korea’s Participation in the Vietnam Conflict : An Analysis of the US-Korean Relations」, Orbis 21, no.4(Winter), 893-912

Thompson,W.S, 1975, 「Unequal Partners : Philippine and Thai Relations with the U.S, 1965-75」 ,

Lexington : Lexington Books,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조너선 닐 저, 정병선 역, 2004, 『미국의 베트남 전쟁: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 책갈피

안정효, 2005, 『지압 장군을 찾아서』, 들녘

오제하 리뷰어  super_bo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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