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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성스러운 공간”? “저항의 공간”?한국사회의 변동과 함께 변화해온 명동성당의 ‘장소성’
오제하 리뷰어 | 승인 2017.08.01 08:51
1950년대 중반의 명동성당(출처: 위키피디아)

어느 저항 운동이든 저항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맥락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저항의 상징을 띠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2016년 말, 2017년 초를 뜨겁게 달군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의 경우, 그 핵심 상징은 단연 광화문이었다. 한국의 197~80년대와 90년대를 아우르는 시기 저항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명동성당이 남아있는 것 같다(명동성당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 사회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할 때, ‘장소성’이란 개념을 쓴다.

정희선종교공간의 장소성과 사회적 의미의 관계 : 명동성당을 사례로」(『한국 도시지리학회지』 제 7권 1호 97~110p. 2004)는 한국 사회에서 명동성당의 장소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본다. 명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교회로서 “성스러운 공간”이기도 했고, 7~8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머물며 농성을 하고 보호를 받는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공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국 사회의 변동과 함께 변화해왔다.

 

“성스러운 장소”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성스러운(sacred)’ 종교적 공간으로, ‘성역(sactuary)’에 해당한다. 흔히 ‘성스러운’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영어단어는 holy와 sacred가 있는데, holy는 ‘경외’와 같은 감정에 초점을 둔다면, sacred는 ‘성스러움이 구체화되고 체험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스러움이 구체화된다는 건 어떤 공간이 상정됨을 말하며, 이는 곧 성역을 일컫는 것이다.

성역은 금기를 갖는다. 흔히 도망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금기와 연결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다. 신성한 장소에서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금기가 하나요, 또 하나의 금기는 도망자가 피신처를 제공받지 못해서 사람들을 저주할 때 인간과 신 모두에게 사악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공포에 근거한 금기다. 예컨대 한반도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삼한시대의 ‘소도(蘇塗)’는 죄인이 도망쳐 와도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명동성당은 1898년 천주교 교회에 의해 건축, 완공되었다. 1787년 조선의 첫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이 있던 당시 명례방 장례원 옆 언덕이 그 장소로 선택되었다. 명동성당은 언덕 정상에서 도성을 내려다보는 입지였는데, 당시 서양 건축문화에서는 이런 입지가 일반적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구릉 정상에 거대한 고딕 건축물이 솟아 있는 모양은 이질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천주교회는 토지매입과정부터 한성부와 마찰을 빚었다(한성부는 풍수지리를 내세웠다). 명동성당의 입지부터가 천주교가 수용되어온 과정(박해 등)을 잘 보여줬다.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본당이었기에, 일제 강점기에 일제로부터 철저하게 감시와 규제를 받았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선교에 차질이 없도록 일제와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3⦁1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로도 천주교는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 정파들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는다. 명동성당에서는 1946년 ‘대한독립촉성 중앙위원회’가 소직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린다. 천주교회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이후로도 정권과 협조관계를 맺는다. 6⦁25 전쟁 때도, 유엔군 사령부에게 로비를 넣어 유엔군의 폭격 대상에서 성당을 제외시켰다.

 

“저항의 공간”
명동성당

한편 “저항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그 맥을 같이 했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며 명동성당은 이전과는 다른 사회적 위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법무부장관을 로마에 보내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면서, 서울 교구장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주교는 교회의 사회․정치적 참여를 설명할 이념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지학순 주교가 연루/체포되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명동성당이 갖는 저항적 성격은 심화된다. 같은 해 9월, 2,000여 명의 사제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정의구현사제단의 명의로 시국선언을 하고 명동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이로써 천주교회는 반유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명동성당이 각종 시국선언과 민주화 청원의 장으로서 상징성을 띠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중반은 교회의 정치적 역할이 잠시 줄어들지만, 중후반부터 장기농성과 집회 등이 계속해서 열리면서, 명동성당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항의의 장소로 확실하게 각인된다. 1987년 상계동 철거민의 장기농성은 명동성당 집회의 내용이 각 계층이 겪는 부조리에 대한 항의와 권리 요구로까지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일제 강점기엔 일제에, 해방 이후엔 김구와 이승만에, 한국 전쟁기엔 유엔군과 협조/동조하던 천주교회, 그 천주교회의 공간인 명동성당이 저항의 장소로 불리게 되다니... 한국 천주교가 이승만에게 굴종하다시피 하다가 맞서 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집회⦁시위
허가제의 실시

어찌 되었든 명동성당은 어느새 하루가 멀다하고 집회와 농성이 지속되는 저항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정 부분 사회참여적 성격을 띄어 온) 천주교회의 “탈정치화의 성향이 뚜렷”(104p)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었다. 2000년 말 한국통신 노조원들의 장기농성 이후 대량의 쓰레기 발생 등을 겪으면서, 명동성당 측은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게 된다. 2000년 12월부터는 명동성당이 허가를 하지 않는 한 성당구내에서 농성과 시위가 원천봉쇄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집회⦁시위 허가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2002년 5월 23일부터 시작된 가톨릭 중앙의료원 소속 3개 병원노조의 장기농성 당시에는, 백남용 주임 신부가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기도 했다. 2002년 4월 명동성당 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외치며 70여 일을 농성한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도 강제퇴거, 연행조치를 당한다.

명동성당에서 집회가 열리면 주되게 대성당 앞마당에서 열려왔는데, 집회⦁시위 허가제가 실시된 이후로는 허가되지 않은 집회의 참가자들은 성당 구내로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경우 성당 진입로의 언덕길에서 집회가 열리곤 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점점 다양한 이해집단들이 다양한 문제로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하면서 장기 농성 등으로 신자들이 피해를 입는 일들이 늘어나자 명동 성당 측은 결국 집회/시위에 대한 (사전) 허가제를 도입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시 공권력 투입까지 요청하게 된다. 논문은 이 원인을 “명동성당의 탈정치화, 다기능화, 비성역화와 함께 각계각층의 집단이익추구에 대한 사회전체의 냉담한 반응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평한다.

명동성당의 ‘장소성’ 변화를 보여주는 이 논문을 읽으며, 더 생각해볼만한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우선 명동성당이 저항의 공간으로서 장소성을 지니게 된 데에는 종교적 공간으로서 명동성당이 가진 성격이 기여한 바가 있지 않을까? 즉 명동성당이 ‘성역’으로서 갖는 금기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도피처를 찾아야 했던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어느새 몇 몇 중요한 저항들의 중심지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저항의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명동성당의 장소성에서 종교적 공간과 저항의 공간으로서의 장소성이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명동성당을 포함하여, “성역”의 장소성을 갖는 (종교적) 공간들은 진정 일관되게 사회변혁과 저항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명동성당에서 집회⦁시위 허가제가 실시된 배경으로 논문이 짚는 요인 중 “각계각층의 집단이익추구에 대한 사회전체의 냉담한 반응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은 정말 진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리뷰어가 보기에는 ‘성역’과 사회변혁, 저항의 관계는 명백하게 한계가 있는 관계인 것 같다. 천주교회가 그랬듯 종교는 분명히 부당한 권력과 착취에 대해 저항의 역할도 할 수 있지만, 지배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해관계도 존재한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동성당과 그 주변의 중간계급 구성원들(상인 등)은 명동성당에서 일어나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분은 정말 그랬는지 의문이 든다. 여러 상인들에게 외면받았을 수 있지만, 진정 명동성당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압도다수였을까?

오히려 노동자들의 투쟁은 “성역”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성’이 아니라 ‘속’의 문제이며, “성역”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YS와 DJ 때 집회 건수가 최고조로 늘어난 명동성당은 크나큰 부담감을 느끼면서 집회/시위 허가제로 전환해버린다.

최근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어디 명동성당과 천주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2015년 11월 14일 약 10만 명의 민중(경찰 추산만 해도 8만, 그 중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서울에 모여 노동개악 폐기와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등 11개 요구를 외쳤을 때, 이 정당한 투쟁을 이끈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 탄압에 쫓겨 조계사에 몸을 숨겼을 때, 부처님의 자비를 외치던 조계사는 결국 한상균 위원장을 어떻게 내버렸었던가.

 

참고해볼 만한 논문

추교윤, 「1990년대 명동성당의 사적 위상과 역할」,명동대성당 축성100주년기념사업회, 민족사와 명동성당, 2001,

최병두,「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소성의 상실과 복원」, 2002, 『도시연구』 8, 253~278.

오제하 리뷰어  super_bo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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