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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어떻게 과학의 불확실성을 봉합하는가미국 열대의학 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7.07.28 07:43

과거 제국 열강들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행했던 정책과 그 과정에서 나온 과학적 결과물 중 의학 분야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중 미국 사례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20세기 초반 미국이 필리핀 식민지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실험실 과학이 열대의학 연구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 실상을 살펴보면 필리핀 현지에서 열대의학 연구가 수행되는 과정은 정치적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험실 내부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외부의 다양한 불확실성과 맥락과 혼합되는 과정이었다.

정세권「식민지 필리핀에서의 미국 열대의학의 성격」 (『한국과학사학회지』 , 36, 2014)에서 미국 의사 리처드 피어슨 스트롱(Richard Pearson Strong)이 필리핀에서 수행한 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당시 과학과 정치사회 맥락의 미묘한 긴장을 분석한다. 

 

미국 의사 리처드 피어슨 스트롱(Richard Pearson Strong) 출처: 위키피디아


독자적 연구를 위한 기반 시설 마련:
과학국 설립

1905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전미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에 요청한 필리핀에 대한 과학 탐사의 타당성의 검토 결과 보고서가 루즈벨트의 메시지와 함께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보고서의 결론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가 “열대 지방에서 앵글로색슨 족의 문명화를 완수하는 첫 번째 시도”라고 하며 필리핀에서 수행할 과학적 연구가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강조했다. 루즈벨트 또한 필리핀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국가적 과업(national work)”이라 명명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미국이 필리핀 내 과학 연구를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국은 필리핀에서 진행되는 과학적 조사 전반을 총괄하며 각 부처에서 필요로 하는 과학적 업무, 그 중에서도 실험적 연구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과학국의 주된 활동은 연구 조사와 출판으로 그 중 전체 연구비에서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는 “자연 자원을 조사하고 열대 질병을 연구하여 필리핀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었다. 식민지 과학 연구에 대한 전통적 관점 중 하나는 식민지에서 취합된 정보와 자원이 제국으로 이동하여 제국 과학의 영역 내에서 과학의 언어로 정식화되거나 과학적 지식을 획득한다. 반면 필리핀의 열대의학 연구 사례에서는 과학국의 존재로 인해 필리핀이 미국과는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상태에서 과학이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고 있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서양 의학의 수준은 식민지 내 질병에 대처할만한 수준을 갖추지 못해 현지 질병 관리에서 토착민들의 지식보다 우월하다 할 수 없었다. 또한 현지 과학 설비의 미비로 상시 본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실험의학의 발달과 함께 유럽 의학이 상당 수준 발전했고 마침 필리핀 식민지를 지배하던 19세기 후반 미국은 최신 실험실 과학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필리핀 현지에 최신 실험 설비를 활용할 수 있는 과학국을 설립한 상태였다. 자연스레 필리핀 내 열대의학 연구는 제국과 어느 정도 독립된 상태에서 현지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스트롱 연구의 잡종적 성격:
전통과 현대의 결합

1899년 필리핀에 도착한 미국 의사 스트롱은 미국 열대의학의 연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897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99년 군의관 신분으로 필리핀에 파견되었다. 선진적 수준의 과학 실험 시스템이 완비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에서 본 적이 없고 정보가 많지 않은 식민지 현지의 질병을 이해하려면 치료법에 우선하여 병 자체를 확인하고 분류하는 전통적인 작업을 필요로 했다. 스트롱은 1900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말타열(Malta fever)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환자를 부검하여 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규명하고, 대장 섬모충과 설사 사이의 연관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혈액과 대변 분석 및 시체 부검 방법 등을 이용했다. 

반면, 이미 원인균이 확인된 질병의 경우 앞서 진행한 분류학적, 병리해부학적 검사가 생략되고 백신 제조를 위한 실험실 연구를 바로 수행하였다. 이미 6개월 동안 독일 베를린 전염병 연구소를 경험한 스트롱은 독일의 실험적 연구 경험에 기반하여 자신만의 콜레라 백신을 제조하려 했다. 그는 이미 나와있는 두 종류의 콜레라 백신의 부작용에 주목하여 효과는 기존 것과 비슷하면서 부작용은 없는 백신을 만들었다. 

이처럼 필리핀에서 스트롱이 수행한 열대의학 연구는 “전통적인 질병 분류 및 병리해부학적 접근과 세균학, 면역학 같은 최신의 실험적 기법이 결합”한 잡종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255쪽) 그러나 스트롱이 연구한 결과물들은 그 효능과 상관없이 논문에서 소극적 결론으로 마무리 되거나, 현실에서 바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스트롱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의 경쟁우위를 쟁취하기 위해 이제 실험실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제국과 과학의 동행:
1906년 인체 실험 사고

스트롱보다 앞서 만들어진 하프킨과 콜의 콜레라 백신은 이미 인도와 일본에서 각각 그 효능을 증명했기 때문에 스트롱 역시 그의 백신이 실제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입증해야만 했다. 우선적으로 스트롱은 1905년 5월 빌리비드 교도소 수감자 4,000명에게 자신의 백신을 접종하여 부작용을 보인 사례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 해 8월 콜레라가 발병하였고 빌리비드 교도소에서 예방접종을 받은 사람들 중 0.2%만 콜레라가 걸려 스트롱은 그가 만든 백신의 유효함을 어느 정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통계 표본이 너무 작아 더 확실한 실험을 필요로 했다. 

“하프킨으로 대표되는 동료 과학자와 스트롱의 백신 연구 경쟁은 표준화된 공통의 조건을 가진 실험실에서 판가름 나지 않았고, 다양한 사회적 맥락이 뒤섞인 외부 공간으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표준적인 실험실에서 진행된 연구들 각각은 실험실 바깥으로 나와 경쟁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노출된 열대의학 실험의 불확실성은 외부의 정치적 지원에 의해 봉합되었다” (258쪽)

1906년 11월 스트롱은 우선 하프킨 백신의 효능을 검증하기 위해 수감자 24명에게 하프킨의 생백신을 주입했다. 문제는 사흘 후 백신을 맞은 수감자 중 2명이 아프기 시작하고 며칠 뒤 13명이 사망하며 발생한다. 부검 결과 사망자 모두 페스트균에 감염되었고, 스트롱이 실험에 사용한 콜레라 백신이 페스트균에 오염된 것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스트롱의 콜레라 백신이 어떤 경로로 오염되었는지, 누가 스트롱의 실험을 허가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조사하였다. 특히, 스트롱의 백신 접종 실험은 관계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된 것으로 그가 교도소  수감자 사이에서 “유행하는” 질병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임의로 남용한 셈이었다. 위원회는 스트롱에게 세균이 들어있는 배양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점까지 포함하여 ‘직무유기’ 혐의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필리핀 법부장관은 스트롱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은 채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수감자 13명이 사망한 사건은 본국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스트롱에게 아무런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다. 필리핀 사건은 1902년 영국령 인도에서 일어난 비슷한 의학 인체 실험 사고의 결과가 내외부적으로 복잡한 갈등을 양산한 역사와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는 당시 필리핀과 미국 본국의 관계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식민지 필리핀에서는 식민지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 관료들과 의학 전문가들 간에 공통의 목표를 위한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스트롱의 사고가 비교적 관대하게 마무리된 데에는, 그가 필리핀 관료들과 돈독한 사이였다는 사실, 실험 사고가 필리핀인들을 구하 려는 가치 있는 활동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불행 정도로 간주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263쪽)

“콜레라 예방이라는 대의명분이나 실험실 의학에 대한 믿음”이라는 목적 아래 스트롱의 사고는 관대하게 마무리되었다. 저자는 이 결과를 통해 미국이 필리핀인을 “과학적인 실행과 담론 혹은 정치적 기획을 통해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필리핀 지배 및 인체실험에 대해서 조차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는 객체로 간주했던” 제국주의적 시선을 드러낸다. (264쪽) 그 과정에서 스트롱이 실험을 진행한 빌리비드 교도소는 과학자의 통제를 받는 과학적 공간이 아닌, 스트롱이 식민지 필리핀에서 두른 제국의 보호막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지적 공간으로 역할했다.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 인체 실험은 피실험자의 동의를 받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고를 방지하고 수습하는 전 과정에 언제나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다. 실험실 내부의 결과를 외부에서 검증해야 했던 스트롱이라는 미국 제국의 한 의사가 진행한 실험과 그러부터 야기된 사고는 필리핀이라는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와 더불어 당시 식민지 내 과학 연구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스트롱의 의학 연구는 “과학국이나 필리핀 과학 저널 처럼 식민지 내부에서 자체적인 과학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마련된 제도적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가 불확실성이 다분한 인체 실험을 강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필리핀인을 구제한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시선”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67쪽)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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