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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지, 분단 지역, 혹은 이중의 식민지1950~70년대 오키나와 지역 문제의 성격 규정과 정체성에 관해
강병준 리뷰어 | 승인 2017.08.02 10:55
오키나와 주둔 미공군 제18전투비행단이 F-100 전투기에 Mk.28 핵폭탄을 적재하고 있다. 1962년 10월 23일 촬영, 미 정부에 의해 저작권 공개된 자료.

오키나와이중의 식민지다. 이 규정으로는 한편으로는 순전한 역사적 사실이다. 오키나와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 국가가 존재했으나 1609년 이후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1945년 이후로는 미군의 사실상의 점령 하에 있으며, 일본은 아시아의 지정학적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오키나와가 사실상 미군의 점령지로 남아있는 것은 일본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오키나와가 식민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규정은 맥락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규정이다. 오키나와 문제의 당사자인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너희는 미일 모두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해야 마땅하다"고 외부자로서 강요하는 처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독립을 쟁취해 낸 나라이자 통일을 갈망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은연 중에 그 두 가지 가치를 절대화,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오키나와 문제에 관한 몇몇 글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 즉 오키나와 문제의 역사적 근원을 살펴보면 오키나와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성 문제가 언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문제는 오늘날 운동의 핵심 의제로서는 거론되지 않고 심지어 비가시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의문을 해소하고자 하는 공부로서 출발했다.

이를 위해 본 리뷰에서는 임경화 씨의 2015년 논문 「'분단'과 '분단'을 잇다 - 미군정기 오키나와의 국제연대운동과 한반도」 (『상허학보』 44, 2015.6, 229-269)를 중심 텍스트로 삼아,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제 사회의 각 부분들에서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었고, 또 그같은 규정들이 서로 어떤 식으로 충돌하며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근대적 독립국가로서 정체화할
기회를 놓친 류큐 왕국

그러나 그에 앞서 2차대전 이전의 상황도 짧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 문제의 뿌리가 일본으로부터의 식민 지배에 있다는 관점에 입각하자면 미군 점령 이전의 상황과의 연결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번 맥코맥 교수의 2016년 논문은 긴 시간적 범위를 망라하여 오키나와 식민 문제의 역사적 흐름을 잘 정리하고 있다.

1609년 오키나와 지역을 복속한 일본은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류큐 왕실을 형식상 유지시키고 대외적으로 여전히 중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는 독립국인 것처럼 연기하도록 강요했다. 중국과 일본에 이중 복속된 애매한 상태는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80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일본의 에도 정권이 약화되고 때마침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지역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럽 국가들은 류큐의 주권이 중국과 일본 양쪽에 종속되어 있다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류큐를 독립국가로 간주하여 협정을 체결했다. 유럽 국가들의 속내야 물론 류큐의 자주권 따위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시아 식민화의 거점을 마련하려는 것일 뿐이었지만, 류큐 입장에서 보자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잘만 이용하면 중국과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기회를 모색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류큐의 민족 지도자들은 소극적이고 전근대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했다. 개항을 요구하는 유럽 국가들과,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오키나와 지역의 일본 편입을 요구하는 일본 양측에 대해, 류큐의 보수파는 중국의 조공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만을 희망하며 아무런 근대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타 국가들에게 있어 별다른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요 류큐 내의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어떤 동력을 생산해내기 위한 구심점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지식인들과 독립운동 세력이, 비록 즉시 자력 독립을 쟁취해 낼 역량은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의 형태로 근대적 공화국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며 대중적 독립운동의 구심력을 생산했던 것과 대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근대 일본에 강점되는 과정에서 오키나와의 민중은 '근대적 독립국가 오키나와'라는 정체성을 상상해 볼 기회를 사실상 가져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로부터의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분단 지역'으로서의 정체성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오키나와를 전략 거점화하기 위해 대규모 주둔 기지 건설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미군이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주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고 1956년 무렵에는 그 절정에 이른다. "섬 전체 투쟁" 혹은 "토지보상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투쟁은 강경자 씨의 논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오키나와 반전, 평화, 반-미군기지 운동의 제1세대로 규정할 수 있다.

강경자 씨의 논문에서는 이를 단지 "경제적 보상요구나 생존권 보장"의 성격이 강한 투쟁에 그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오키나와의 지역 정체성 형성의 역사 면에서 볼 때 이 투쟁은 그 의미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투쟁을 주도하거나 지도할 만한 정치 세력이 없는 조건에서 주민들 스스로가 아래로부터 들고 일어난 투쟁이면서, 그 전개 과정에서 스스로 오키나와를 '일본과 본래 하나'인 것으로 규정하여 일본 대중으로부터의 연대를 호소하는 투쟁 전략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이므로 오키나와에 가해지는 미군의 폭력은 곧 일본에 대한 폭력이라는 논리로 일본과 일본 대중의 연대와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다.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일본 국가가 오키나와에 대한 가혹한 동화 정책을 편 바 있기는 하나, 종전 이후 일본 본토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오키나와를 버리고 외면하는 상황에서 오키나와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일본의 일부로 여기는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호소는 물론 일본 정부와 주류 정치권에 철저히 외면당했다. 일본의 보수 세력은 2차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위해 오키나와를 거래의 제물로 희생시킨 장본인들로서, 미국의 아시아 지역 군사 전략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지역적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있어 동일화의 대상은 오키나와보다는 오히려 미국이었다. 미군의 통치를 방해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바로 그 점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태도 문제는 곧 일본 국가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일본이 오키나와를 진정한 일본의 일부로 여기고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서 책임 있고 당사자적인 태도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일본의 종속적인 대미 관계를 파기하고 미국의 아시아 군사 전략에 대한 협조와 참여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고, 이는 곧 일본이 2차대전 이전에 누렸던 것과 같은 패권적 지위를 다시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보수 정치권의 외면 속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에 대한 연대의 물꼬를 튼 것은 일본공산당 등 좌파 세력이었다. 일본 내 좌파 세력은 또한 오키나와와 국제 연대운동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쟁은 국내적으로는 미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평화헌법 하의 일본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일본 복귀 투쟁으로 발전해갔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과 함께 탈식민지화라는 공동의 과제를 공유한다는 인식 하에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등을 기치로 내세운 국제 운동과 연결되는 경향을 띠었다.

 

미완의 과제를 남긴
제3세계와의 연대와 일본 복귀 운동

베트남 완전 점령에 실패한 프랑스군이 위신을 잔뜩 구긴 채 1954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하자, 전 세계 피식민 지역의 민중은 제국주의적 강대국을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곳곳에서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독립을 이룬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은 미국에도 소련에도 종속되지 않으려 하는 독자적 블록을 형성하여 '제3세계'로 명명되게 된다.

이 블록에 오키나와와 함께 북한이 포함되면서, 1970년대까지 한반도와 오키나와 사이의 연대는 남한보다는 북한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 블록에게 있어 한반도, 베트남, 오키나와 세 지역은 분단지역이면서, 제국주의 세력 특히 미국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통일과 평화 상태가 안착되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었고, 탈식민지화의 과제가 완수되지 못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였다.

이들에게 있어 오키나와는 아시아와 일본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였다. 아시아 지역의 제3세계 국가들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침략의 피해를 겪은 나라들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단지 적대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친미 서방 진영에서 떼어내어 아시아 공동체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오키나와 문제는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한 점령과 식민지화의 피해 당사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근거일 수 있었으므로, 일본을 '아시아'의 일원으로 포섭할 수 있는 접점으로 간주되었다.

오키나와에 대한 제3세계 운동의 연대는 일본 내의 시민사회 영역과도 활발히 연결되었고, 또 UN 등 국제사회에서도 오키나와 문제를 이슈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어느 정도 오키나와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있어 진전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떤 점에서 이들 진영은 오키나와 문제 해결 그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하여 연대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위한 일종의 수단 격으로 보고 활용했던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측면은 특히 북한의 활동과 역할에 집중해서 볼 때 눈에 띈다. 북한은 오키나와와의 연대를 내세우면서 남한 및 미국에 대한 자신들의 무력 투쟁에 오키나와 및 베트남에 대한 연대의 의미를 부여했다. 북한의 언설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한의 무력 투쟁 노선과 오키나와 주민들의 운동은 서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오키나와 섬이 미군의 전쟁 활동을 위한 군사 거점으로 쓰이는 것을 경험하면서, 오키나와의 미군 점령 상태에 대해 다시금 인식을 새로이 함과 더불어 자신들의 일본 복귀 운동과 베트남 민중의 저항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했다. 이에 따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어 오키나와를 즉시 일본에 복귀시키라는 요구는 미국의 전쟁 활동에 수동적으로나마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이자, 더 나아가 베트남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반전 운동과 연결되는 것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반면 북한은 제2전선을 형성, 즉 미국의 군사적 역량이 베트남에 집중되지 못하도록 분산시켜 베트남 민중의 투쟁을 측면 지원한다는 '무장 투쟁' 노선을 고수하여, 푸에블로 호 사건 등을 일으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황을 고조시켰다. 북한의 이같은 행동은 간접적으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1972년의 오키나와 반환에서 북한의 위협은 오키나와의 미군 주둔 지속을 정당화하는 강한 명분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민들이 원한 바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은 이루어졌으나, 그 모습은 주민들이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반환을 통해 미군에 의한 점령 상태가 종식될 것을 기대했으나, 미일 양국의 공모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미군의 점령은 그대로인 채 민정만을 일본에 이양하는 형식적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키나와와 북한 사이의 '연대'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임경화 씨의 관점으로부터 다소 거리를 두고 읽어야 하는 측면이 있다. 임경화 씨 스스로가 "북한 정권과 오키나와 민중조직 사이의 관계라는 연대 주체의 비대칭적 상황"을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고, 또 북한의 군사행동이 오키나와 "주민들을 또 다시 억압하게 되는 새로운 안보체제 구축에 부정적으로 관여"했다며 적절히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0~1970년대 여러 사건들의 흐름에 관해 서술할 때는 마치 북한이 오키나와 민중 운동의 실질적인 연대세력으로 역할했던 것처럼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정치 이론가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초기 지도자인 토니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이론에서, 소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로 불리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및 친소 국가들을 사회주의 체제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적 성격의 체제도 아닌 순전한 자본주의 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재검토한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두 가지 요소로 경쟁축적을 들었음을 재발견하며, 소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서방 진영과의 지정학적 경쟁 및 거기에서 이기기 위한 고강도의 축적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노동 계급이 권력에서 배제되어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정치경제적 메커니즘이 질적으로 동일했다고 지적한다. 단지 그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서 시장과 국가의 주도권 배분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운영 방식의 측면에서 다소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이론 틀은 동구권과 서구권 어느 쪽도 악마화하거나 천사화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패권주의적 발로에서 지정학적 경쟁을 벌인 세력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유용성이 있어 보인다. 이 이론 틀에 입각하기로 하자면 북한에 관해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배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한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묘사해서는 안된다는 레드 컴플렉스가 그 하나라면, 북한에 부분적으로나마 탈자본주의적이고 해방적인 속성이 있다고 보는 환상은 또 다른 하나이다.

하다못해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의 국가들은 그 건국 과정에서라도 반제국주의적 민중 항쟁의 역사를 거쳐온 데 비해, 북한은 그나마의 민중 항쟁의 역사조차 없이 소련에 의해 인공적으로 건설된 국가다. 북한 정권의 지배자들에게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한 최소한의 관점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들의 언설이 제아무리 '인민의 해방투쟁' 따위의 메타포를 동원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실질적인 실천이 결국 대중의 자발성이 배제된 국가 차원의 군사 행동으로만 귀결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70년대 북한의 행동이 결국 북한과 오키나와 사이의 관계를 상호 간에 부정적인 결과로 치닫게 한 사실은, 북한을 어떤 대중 운동 세력처럼 간주하기보다는 그저 경제적,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로 볼 때 더 깔끔하게 설명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과 오키나와 민중 조직 사이의 ... 비대칭성"은 단지 형식적인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계급적 차이였고,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 있어서의 물질적 기반과 이해관계의 차이였다. 애당초 북한 정권은 그 본질 상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실질적으로 고무하고 전진시키는 대중적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무기력하게 소모된
'류큐 독립'의 구호

오키나와 운동의 주류가 일본으로의 복귀를 핵심 요구로 내걸면서 일본 내 좌파 및 제3세계 운동과 주로 관계맺었다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아시아 지역 친미 국가들과 관계맺은 소수 비주류 세력도 존재했다.

잠시 1950~1970년대 오키나와 운동사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점령 상태의 종식을 바랐고, 일본으로의 복귀를 통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민들의 투쟁의 성과로서 일본으로의 복귀는 이루어졌으나, 정작 주민들이 종식을 소망했던 미군의 점령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친미 색채를 강하게 띠었던 "류큐 독립운동" 세력에게 있어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은 그다지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국외에서 타이완 등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다가 1957년에 "류큐 국민당"을 결성하여 1960년에는 오키나와 입법원 선거에도 후보를 내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를 내건 이들은 주민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 전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키나와 내에서 극히 소수에 머무른 이 운동 세력에 주목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의 관심사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공 안보 체제를 주도할 블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동아시아 지역의 몇몇 친미 국가를 모아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의 창설을 주도하는데, 여기에는 타이완, 필리핀, 태국, 남베트남과 함께 홍콩도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참가했고, 류큐 독립운동 세력도 포함되어 "7개국"을 구성했다.

이승만과 류큐 독립운동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일본의 패권적 지위 회복으로 받아들여 극도로 견제했다는 점과, 오키나와를 반공의 보루로 삼아 미국 지원 하에 아시아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관심사가 일치했다. 이를 위해 두 세력은 류큐를 친미 성향의 독립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의 구상은 60년대 접어들면서 전망이 불투명해져 동력을 잃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일본 중심의 아시아 방위 체계를 구축하고 있던 미국이 APACL의 집단안보체제 구상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류큐 독립에 지지나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미국의 촉구에 따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는 등 일본을 중심에 둔 미국의 아시아 방위체계에 편입되게 된다.

1960년대 말 오키나와 반환이 논의되기 시작하자, 박정희 정권은 반환으로 인해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기능이 저하되면 한국의 안보에 위협이 제기될 것을 우려하여,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더라도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만큼은 유지하여 계속해서 미군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는 물론 미국도 바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남한 역시, 오키나와 문제의 지속과 고착화에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되었던 것이다.

 

오키나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1800년대 류큐 왕국의 보수적인 지배층들은 일본과 유럽 국가들의 야욕에 직면하여 류큐의 독립을 지켜내려 했지만, 청나라의 힘을 빌려 중국에 대한 종속을 유지한다는 비현실적인 구상에 매달리는 무능함을 보이며 실패했다. 또한 1950~1960년대의 류큐 독립운동 세력 역시 오키나와 주민들이 실제로 절실하게 겪고 있는 문제점과 요구와는 전혀 동떨어진 친미 반공 이념적인 구상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동력 확보에 실패했다.

이렇듯 오키나와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대안들이 현실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실패해가는 동안, 오키나와 주민들은 스스로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를 일본의 일부로, 일본과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분단 지역으로 정체화했고, 일본 내 좌파 세력과 제3세계 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그들 스스로의 전략과 대안을 발전시켜 왔다.

그 대안이란 외형적으로는 일본 영토로의 복귀 요구라는 형태를 띠었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일본 정부가 대미종속적 정책을 철폐하고, 미국의 아시아 지역 군사안보 전략으로부터 이탈하여 아시아 각국과의 평화 협력을 도모하면서, 일본의 일부로서의 오키나와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을 향해 적극적으로 협상과 대응에 나서는 것을 의미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72년의 오키나와 복귀는 영토의 이전이라는 형식만을 띠었을 뿐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 종식이라는 내용을 담지 못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운동의 요구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결과였던 셈이다. 그러나 1960~1970년대 일본 복귀 운동의 핵심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평화운동에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오키나와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며 투쟁 중인 주민과 연대 세력들은, 오키나와를 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거점으로 삼아 미국 주도의 아시아 안보 전략 및 그것이 야기하는 군사적 대립 구도에 대항하는 평화적 대안 담론을 건설해 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전의 오키나와 일본 복귀 운동이 그 궁극적 목표로 삼았었던 일본의 아시아로의 귀환, 일본을 포함하는 아시아 공동체 건설 구상과 맞닿는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실제 삶의 조건에서 출발하여 생각할 때, 여전히 오키나와 문제 해결의 유일한 대안은 일본 속에서 일본 대중과 함께 투쟁하는 길일 듯하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작은 운동 동력을 갖고 더 고립된 조건에서 미국을 상대로 투쟁한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더 작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뿐만 아니라 일본 역시 오키나와 문제의 역사적 공범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키나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일본 국가 성격의 근본적 변화와 서로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오키나와 문제의 해결은, 일본이 전쟁국가이기를 포기하고 평화국가로 전환하기를 바라는 일본 및 아시아의 진보적 대중과의 연대 투쟁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가 일본에게 있어 여전히 식민지라고 할 때, '식민지'의 의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타국에게 지배를 받는 지역이라는 측면과, 2)식민 모국의 다른 지역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지역이라는 측면이 그것이다. 실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의 제물로 팔아넘겨지거나 미일 양국의 공모에 의해 몇 번이고 기만당하는 등, 2)번 측면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줘 왔다.

그렇다면 이중의 식민지로서 오키나와의 현실에서, 오키나와의 일본에 대한 탈식민화는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1)보다는 2)의 해결을 우선시해야 할 듯하다. 2)가 해결되어 일본 국가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기존의 기만적인 태도를 버리고 책임있는 태도를 보일 때, 비로소 오키나와 주민들이 당면한 삶의 문제인 미군에 의한 점령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미군 점령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라도 궁극적으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성취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오키나와 주민들 스스로의 의사에 달려 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해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 문제는 외부자로서는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지금의 시점에서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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