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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기 조선의 식물학 연구중립성을 표방한 ‘이중의 정치학’
문지호 리뷰어 | 승인 2017.04.03 06:00

일제 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근대 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경시되어온 과학을 쉽게 선택하거나 일본의 제약에서 벗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조선에서 ‘식물학’ 분야는 특이하게도 ‘자연과학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과학 연구의 토착화가 이루어진 학문 분야였다. 이정 대만중앙연구원 연구원은 논문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 일제강점기 조선의 향토적 식물 연구」(『한국과학사학회지』 , 37(1), 2015)에서 “식물학의 이러한 이례적 성공의 비결을 몇몇 뛰어난 학자의 사례가 아닌 연구 단체를 통해 드러나는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보겠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다수의 식물학자가 탄생하고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적될 수 있었을까? 과연 일본인 교원들이 기억한 대로 이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갖고 향토적 이과 교육이라는 사명에 충실했던 덕분일까? 또 일본인 교원들과 조선인들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던 것은 과연 자연과학에 고유한 ‘중립성’ 때문이었을까?” (266쪽)

위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하자면, 식물학 연구에 참여한 일본인과 조선인 참여자들은 그들이 바라는 목적이 각기 있었다. 그들은 연구 세팅 초반에는 그들의 목적을 과학의 중립성으로 포장했고, 이후 식물학 연구 분야가 점차 안정화되며 각자의 이해관계를 드러내게 된다. ‘중립성’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향토적 식물 연구가 갖는 이중의 정치성 이란 특징을 정의한다. 

“이 글은 향토 식물 연구의 이례적 성공이… 향토적 식물 연구가 갖는 이중의 정치성 덕분임을 보이고자 한다. 여기서 ‘이중의 정치성’이란, 식민 현지의 조선인과 일본인 연구자들이 중심부 과학과 경쟁하며 연구자로서의 성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공히 향토적 식물 연구를 내세우는 넓은 차원의 정치성과, 제국주의의 도구로서 더욱 정치화된 과학 활동을 통해 조.일 각각의 상이한 ‘향토성’을 담은 향토 연구를 담은 향토 연구를 탄생시키는, 합의되지 않은 식민 지배를 둘러싼 대립적 정치성을 의미한다.” (266쪽)

 

조건부 동지:
조선 내 일본인 과학자와 조선인 과학자의 일시적 협력

우선, 넓은 차원의 정치성 관점에서 조선에 있던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자연물을 연구하여 일본 현지에 있던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과학자들과 차별성을 두고자 했다. 일본에는 이미 조선 식물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나카이 타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가 있었는데, 그는 1913년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학술 영역에서도 힘쓰고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고 식물학 연구 성과가 전무했던 한국 식물에 대한 독특성을 밝힌 저작들을 펴낸 바 있었다. 조선에 있던 모리 타메조(森爲三, 1884-1962)와 도이 히로노부, 土居寬暢, 1884-?)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은 나카이의 연구를 상당 부분 계승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차별성이 있음을 피력하고자 노력한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근대 과학에 대한 강한 열망과 기대감을 갖고 있던 조선인들 입장에서 “채집 여행과 표본 만들기, 표본 관람을 포함한 조선 식물학 연구는 조선인들이 직접 주관하여 전시까지 열 수 있는 예외적 과학 활동”으로 다른 과학 분야와 비교해 접근이 쉽기도 하고, “전통 학문과 갖는 뚜렷한 차별성은 그 근대성을 입증”할 수 있다 여겨져 의지를 갖고 수행할 학문으로 정해졌다. (276쪽) 여기에 조선인들은 일본이 제공하는 과학 연구의 한계과 부족함을 비판하며 그 부족함을 조선인들이 메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일본인들의 ‘문명화’에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자리를 찾으려 하였다. 이런 조선인들의 노력은 조선의 식물과 곤충을 스스로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고, 표본실을 마련하고, 개인이 모은 표본을 기증하는 등의 행동에서 나타났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손으로 자연을 연구하자는 움직임”은 여러 제도적 기반의 도움을 받아 식물학 분야의 엘리트 자연과학자를 배출하는 기반을 닦았다. 

 

중립성의 정치:
방패 뒤 속마음

이처럼 일본 제국의 과학자를 의식한 조선 내 일본인 과학자 그리고 조선 내 일본인 과학자를 의식한 조선인 과학자들의 긴장 관계 속에서 ‘중립적’ 향토 식물 연구는 만들어졌고, 연구는 점차 제국주의의 도구로 정치화되며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르게 만들어낸 ‘향토성’을 드러낸다. 총독부 소속 전문가들의 주도 하에 1923년 결성된 조선박물학회 활동은 이렇게 상이한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조선박물학회의 활동에는 모리와 도이를 포함한 일본인 과학자들과 조선인 박물 연구자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행보는 “조선의 박물은 더 연구하고, 그 향토적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의 박물 교육을 향토화시키고 향상시키자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목표에 대해 진정한 합의가 이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282쪽) 

그러나 결과물의 양상을 보면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어, 경남의 향토를 연구한 『경상남도 향토연구―박물』 (1934)는 조선, 특히 경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 300여 종을 선정해 ‘향토적 의의’를 밝혀 조선의 향토성을 강조한 것 같았지만, 이들 식물의 태반이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이었고 소개한 향토적 의의 역시 일본 문화의 소개에 다름 없었거니와, 일본에서 귀히 여기는 식물들을 추가하는 등 “일본 교재로도 손색이 없도록 해 둔” 결과물이었다. 저자는 이들의 결과물을 분석하며 일본인 과학자들이 조선에서 그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향토적 전문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나카이의 분류학적 성과를 차용했음에도 나카이를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학술적 연구를 나카이의 연구와 다른 차원에 위치시키려는 듯” 한 정치성을 보인거라 하였다. (284쪽) 마찬가지로 일본인 박물 교원들은 조선에서의 박물 연구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을 얻고자 조선 박물의 지방화와 차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조직의 절반을 차지하는 조선인들을 위시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지원을 얻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 학자들은 지원이 확보된 이후 조선인들을 ‘제2의 국민’으로 규정하여 ‘제1의 국민’인 일본인이 문명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켰다.  

조선인 과학자들 역시 과학의 ‘중립성’을 방패 삼아 일본인들을 도와 과학을 한다는 껄끄러움을 정당화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의 노골적인 차별화를 느끼고는 그들 역시 조선인 단체를 조직하여 자체적인 연구를 수행하려 시도하였다. “자신들이 직접 생산하지 않은 지식은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로 일본과는 다른 조선만의 연구 결과를 내려 하였는데  『조선 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은 그 일부의 흔적이다. 이정은 이 결과물이 당시 조선 과학자들의 학문 활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생각했다. 예를 들어 조선인 연구자 정태현은 일본 나카이의 세분적 분류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지만 그에 더해 “식물의 성장 환경과 식물 변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나카이가 분류한 식물 중 환경이 달라져 유지되지 않는 변이종을 지적하는 등 나카이와는 차별화 된 연구를 하려 한 시도를 보인다. 더불어 도감에 수록된 조선 식물에 그 식물이 가진 다양한 명칭을 모두 기록하는 등 “조선인들 사이의 협력의 결과 탄생한 ‘조선인’ 연구자의 ‘조선적’ 식물 연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 식물에 대해 정리한 최초의 식물도감으로 2천여 종의 식물명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결론적으로, 조선에서의 박물학이 막 시작하던 초기에는 “식민지에서의 삶을 통해 전문가로 성장해보려는 일본인들의 조선 동식물 연구열이, 채집이라는 낯선 활동을 적극 수용해 이들 일본인 교원들과 같은 자연과학자가 되고, 그리고 조선의 과학 문명을 직접 만들어보려던 조선인들의 열망과 만났던.” 배경이 있었다. (295쪽) 저자는 각자가 가진 목표를 품에 안고 만든 “조건부 동지” 관계 하에 이들이 함께 내세운 ’과학의 중립성’은 어느 정도 기반이 자리잡자 서로의 정치적 입장이 다름을 인식하고 ‘각자의 향토’ 연구로 갈라졌다.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예술의 ‘중립성’, 문학의 ‘중립성’과 같은 주장이 예술 혹은문학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 없듯, 과학에 내재한 어떤 특성일 수는 없다. 하지만 유난히 과학 활동에 대해 이 주장이 더 자주 반복되어 온 이유는 제국주의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간 근대 과학의 태생적 정치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295쪽)

물론 일본인 박물 교원들의 연구열을 정치적으로만 치부해 그 공을 폄하시키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저자가 논문에서 드러내듯, 통감부 시기부터 조선의 이과 교과서가 향토성을 주창하기 시작하며 ‘향토 교재’에 대한 교사들의 관심을 끌어낸 데에는 무엇보다 일본인 박물 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예를 들어, 도이와 모리는 조선교육회의 교육전문지에 “조선의 단풍, 진돗개, 나비 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여기에 “자연물과 관련된 지역의 설화와 민담, 풍속”을 덧붙이기도 했고, 통감부 이과 교과서에는 “누에, 뽕, 목면 등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동식물들을 수록”하며 조선 교과서의 ‘향토화’에 공헌하였다. (272-273쪽)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가 조선 땅에 융화되지 못한 채 조선의 식물학 연구에 일본의 색채를 덧씌우는 데만 그친 반면, 이들에 기대어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인 연구자들은 일본에게서 자립하고자 하는 노력과, ‘친일’ 연구활동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식민성을 극복할 씨앗”을 품어 조선의 향토화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식민지 조선의 식물 연구, 1910-1945: 조일 연구자의 상호 작용을 통한 상이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 이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식민지 시기 조선인 박물학자 성장의 맥락: 곤충학자 조복성의 사례」, 김성원, 『한국과학사학회지』 30(2), 2008.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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