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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신탁통치 정책의 본질은 무엇이었나루스벨트의 인도차이나 신탁통치 정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오제하 리뷰어 | 승인 2017.01.31 14:21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고 한반도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던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역사서술을 할 때, 우리는 종종 “해방”이란 표현을 쓰곤 한다. 이 “해방”의 배경이 당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매우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기에, 같은 시기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민족해방을 갈망했던 인도차이나의 역사가 진지한 고찰의 대상이 되곤 한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패권경쟁을 했는지도 깊게 살펴볼만 하다. 리뷰어는 특히 후자의 문제의식 하에서, Walter La Feber의 고전적인 논문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인도차이나 : 1942-45 (Roosevelt, Churchill, and Indochina : 1942-45)(Commonwealth Lecture, University College London, 1973)의 내용을 소개해보려 한다.

이 논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내건 인도차이나 "신탁통치" 정책을 상당히 냉철하게 꿰뚫어보며 평가하고 있다. 이 논문의 저변에 깔린 필자의 의도는 '트루먼이 루스벨트의 정책을 바꾸면서 인도차이나의 불행이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존 연구들에 반박하는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외치며 설정되었던 “신탁통치” 정책의 본질은 결국 미국의 이익에 있었다. 또한 1944년이 되자 루스벨트 정책은 크게 흔들렸고, 결국 루스벨트 스스로 신탁통치 계획에서 물러났다. 필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인도차이나에 대해 주창했던 “신탁통치” 정책이 어떻게, 왜 폐기되었는지를 주되게 살펴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출처: https://pixabay.com/


이 논문이 다루는 연도는 부제에 써 있듯 1942년에서 1945년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인도차이나 식민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루스벨트의 정책은 이 기간 동안 변화를 겪는다.


인도차이나에 얽힌
서방 지배자들의 이해관계

루스벨트의 초기 정책은 바로 "신탁통치"였다. '전후戰後 인도차이나 지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 미국, 중국, 영국 4개국이 신탁 통치하자'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독자라면, '있을 법한 나라가 빠져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프랑스가 빠져 있다. 루스벨트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 안보 문제에 지렛대(Leverage)역할을 해줄만한 파트너로 프랑스가 아니라 중국의 장개석을 선택했다. 그는 중국이 전후 세계에서 엄청난 발전을 하고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전후 미국의 아시아 지역 안보망을 강화하고, 동시에 싱가폴 같은 영국의 이전 식민지도 제거하려는 속셈도 들어 있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면, "지지 않는 해"였던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지고 있는 해"란 점이 드러났고, 이는 미국에게 명백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군이 유럽을 휩쓸고 소련을 공격하던 1941년 연말,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공격한 일본군은 곧 태평양 일대의 영국 식민지를 휩쓸었다. 말레이 작전을 이끈 일본군의 야마시타 토모유키에게 영국군 사령관 퍼시발이 모욕을 당한 일은 매우 상징적이다. 영국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일본에게 망신을 당했고, 유럽에서도 그다지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 입장에서, 두 세계대전에서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을 적어도 대접은 해줄 필요가 있었다. 영국은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으며, 그래야만 했다. 영국은 미국이 유럽에서 소련에 맞서는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동맹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기존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갖고 있던 지배력을 놓치고 싶지 않아했다. 영국 수상 처칠이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정책에 불만을 제기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는 해" 영국은 인도차이나를 직접 통제할 역량은 못되었다(리뷰어의 농담 아닌 농담을 얹어본다면, 영국의 처칠은 인도차이나에서 추축군에 고전하면서 자존심도 구겨졌을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를 지지했다.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경제, 안보 부문 때문이었다. 인도차이나는 고무, 주석 등의 원산지였고, 서남방향에서 태평양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다. 리뷰어의 설명을 덧붙이면, 싱가폴의 말라카 해협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제해권의 거점이므로 절대 놓쳐서는 안 되었다. 루스벨트가 보기에, 당시 프랑스의 드골은 영국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미국의 이익에는 관심도 없는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 세운 비시정권은 물론이고 자유 프랑스 정권의 드골도 불신했다. 따라서 미국의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에 프랑스의 지배가 복귀하는 것을 순순히 눈감아줄 생각은 없었다.

한편 영국의 처칠은 루스벨트의 견제구에 맞서 프랑스의 식민지 회복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이익을 지지함으로써 루스벨트의 견제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또한 처칠도 중국의 장개석을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였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이 될 수는 있어도 아직은 미국에 의존할 정도로 약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중국이 이후 영국의 식민지에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은 군사, 기술, 경제 부문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처칠은 인도차이나를 영국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남아시아 사령SEAC(Southeast Asia Command)’ 를 만들면서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적인 일본을 두고 있었으나, 둘 사이에도 상당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4년까지만 해도 테헤란 방문 등을 보면, 영국은 미국의 영향력을 넘지는 못했고 미국이 짜놓은 판을 뒤집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루스벨트의 정책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루스벨트 신탁통치
정책의 불안정성

그러나 1944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부 기구들이 루스벨트의 정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 것이다. 외무부Foreign Office와 전시내각War Cabinet, 국무부State Department 등이 루스벨트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 동의해버린 것이다.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며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려 하고 있었다. 영국도 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막후에서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하던 처칠에게 더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중국의 장개석이 미국에게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이 상황은 이미 1943년 카이로 회담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중국의 장개석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도차이나가 아니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공산당, 자신의 독재적 지배체제, 국민당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처럼 자신에게 더 중요한 문제들을 고심하고 있었다.

이후 1944년 일본군의 침공과 중국 공산당의 위협이 거세지자, 장개석은 루스벨트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한다. 1942년 초부터 미국은 중국 남부지역 일부를 자신들의 ‘군사통치’지역으로 설정하고 스틸웰 장군을 보내 장개석을 지원했었다. 스틸웰의 부대는 1944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군사요청을 하는데, 장개석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렛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는 미국에게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당장 봤을 때는, 이들이 중국의 장개석 정부를 몰아내고 있는 세력이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탈환한 일본의 섬들을 관리해야 했다. 프랑스에 드골이, 중국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독립을 경제 성장이 대체함에 따라, 처칠은 퀘벡Quebec, 얄타Yalta 회담부터 본격적인 우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의 ‘남아시아 사령부SEAC’ 본부에 배속되는 등 처칠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루스벨트는 최대한 양보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 발 물러나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직접적으로 점유하되, 신탁통치는 해야한다는 식이었다. 중국까지 쫓겨 가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를 회복하려 하는 프랑스인들을 위해, 프랑스는 루스벨트에게 공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중국의 협조체제가 거의 붕괴되어 가는 탓에, 루스벨트는 결국 자신의 정책을 철회해야 했다. 1945년 루스벨트의 죽음과 함께, 공식적으로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프랑스에 주게 되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신탁통치 정책
그리고 서방 지배자들의 본질

이쯤에서 필자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루스벨트 정책은 트루먼이 폐기한 것도 아니고 국제정세, 영국, 프랑스의 압력과 미국 국가기구의 반대 그리고 루스벨트 자신에 의해서 폐기되었다. 필자가 반박하려는 고전 연구들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정책이 계속되었다면, 정말로 인도차이나가 불행해지지 않았을까? 애초에 그 정책의 본질은 인도차이나의 독립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 강화였는데 말이다. 루스벨트가 있던 미국 민주당은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을 시작한 정권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과연 루스벨트 행정부의 정책이 인도차이나를 행복하게 했을 지에 대해서도 심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사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정책은 애초에 미국의 경제, 안보 부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진정 염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벌인 정부 기관들(국무부, 외무부, 전쟁 내각 등)에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스벨트는 결론적으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독립에 대해 자신이 표방한 이상과 반대되는 방향의 일들, 즉 프랑스가 식민지배자로서 복귀하는 것을 허용했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탁통치’ 정책의 폐기는 루스벨트가 죽기 얼마 전의 결정이라, 루스벨트 그 자신은 진지하게 인도차이나 독립을 바랐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죽기 전까지 그의 ‘신탁통치’ 구상에서 바뀌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들과 그 주민들이 전후에도 즉각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루스벨트가 내세운 것은 완전한 즉각 독립도 아니고 신탁통치(!)였다. 인도차이나가 독립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인도차이나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지 미국 대통령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신탁통치라는 것도 결국 인도차이나에서 타오르던 민족해방의 열망과 격렬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리뷰어는 본다.

인도차이나 독립은 프랑스와 영국이 기존에 갖고 있던 식민지들에 미국이 개입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정책은 서방 국가들을 견제하고는 인도차이나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려는 미국의 패권 추구를 표현한 것이며, 단지 그 방식에서 불안정한 요소가 많은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실패한 것은 미국이 의존했던 '지렛대(Leverage)'들이 모두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도차이나의 지배를 놓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드러난다. 루스벨트가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지만, 인도차이나에서는 그 지배력을 잠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의심스러운 동맹이었고 특정 지역에서는 얄미운 경쟁 상대가 될 것 같았지만, 핵심적으로는 동맹이었다(미-영-프가 서로 견제를 하더라도 적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미국이 최대한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게 더 좋은 것이지만, 미국 지배자들 입장에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게 있어 진정한 적이라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에 맞서는 인도차이나의 민족해방투사들이었을 것이다.

피로 물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출처: https://pixabay.com/


미국은 이후 프랑스를 지렛대로 세운다(심지어 그들은 잠시 호치민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민’)을 은밀히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은 계속해서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같은 지렛대를 새로 만들려고 했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지원하던 프랑스가 베트민에 무너지자, 미국은 직접 베트남에 개입했다. 그리고는 10년 가까이 대학살을 저지른다. 프랑스와 영국의 입장에서는 루스벨트의 정책이 미국의 견제 정도였지만, 인도차이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자신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의 일로 보나, 루스벨트의 속셈만으로 보나 그렇다.

그렇기에 이 논문에서 당시 인도차이나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특히나 베트남은 이 당시 인도차이나의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도, 이 논문에는 호치민의 이름이 한두 번 나올 뿐이다.

이 논문을 읽다보면, 미국 정부가 전후에 내걸곤 했던 ‘신탁통치’ 정책의 본질에 대해서도 일반화해볼 수 있겠다고 리뷰어는 생각한다. 사실 루스벨트만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도 아니다. 트루먼, 처칠, 스탈린도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한반도에 ‘신탁통치’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는 곧 한반도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한반도 좌익의 다수이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도 혼란과 오류를 낳게 만들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Franklin Roosevelt and Indochina, Gary R. Hess, Journal of American History(59), 353-68, 1972

Americans in Southeast Asia, Russel H. Fifield, New York, 36-43, 1972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전쟁의 집: 펜타곤과 미국 패권의 비극(HOUSE OF WAR)』, 제임스 캐럴, 전일휘 추미란 역, 동녘, 2009 
『잊을 수 없는 나날들(Nhung nam thang khong the nao quen)』,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저, 안경환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오제하 리뷰어  super_bo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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