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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성의 가능성탈식민주의 문화번역을 생각하다
이단비 리뷰어 | 승인 2016.11.30 16:20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경계 밖의 문화는 언제나 모종의 시선에 의해 해석되고 말해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번역'이라 부르며, 번역가의 냉철한 시선에 기대기를 서슴지 않는다. 

노동욱 연구자의 「문화번역의 번역(불)가능성 : 탈식민주의 번역 연구」(『동서비교문학저널』33, 2015)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대답한다. 필자는 먼저 ‘탈식민화’의 기재로 쓰여 온 문화번역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주의적(또는 제국주의적) 번역관의 문제점을 살피고, 이에 대한 대안을 역설적이게도 ‘번역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찾고자한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와 문화 간에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백’과 ‘틈새’를 지적하는 일로서, ‘완벽한’ 번역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번역자의 인식과 우월성에 기초해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번역을 통해 타자의 문화를 반드시 자문화의 관점으로 번역해내겠다는 식민주의적 강박”을 벗어나, 타문화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번역불가능성]으로서의 번역의 의미를 제시한다. 


문화번역의
제국주의적 강박


문화번역은 단순히 “의미를 등가적으로 교환하거나 초월적 위치에서 매개하는 작업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타문화를 해석하고 변용해 들여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번역은 ‘다시쓰기’의 작업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옮겨지는’ 위치의 타 문화는 언제나 ‘옮겨 쓰는’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변용’될 수밖에 없다. 즉, 문화 번역이란 언제나 “한 문화가 타 문화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상존”해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번역된 동양의 모습 그리고 동양의 역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양 문화’를 정립하려 시도한 점에서 현재까지도 탈식민주의 문화번역에 있어서 시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 통용되고 지속되어온 식민주의적 문화번역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아체베에 의하면, 콘래드는 『암흑의 심부』라는 작품에서 아프리카를 유럽문명과 상반되는 비문명의 “타자의 세계”로 번역한 바 있다. 유럽문명과 대척점으로서의 아프리카, 혹은 비문명이기 때문에 이성의 언어로 번역되기 어려운 “타자의 세계”는 문화 번역이라는 것이 “문화 간 교량으로서가 아닌 분리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더글러스 로빈슨은, 번역이라는 것이 타자에 대한 인식적 욕망에 기초한다고 할 때 이 욕망은 또한 “‘원시인들’은 실제로 민족지학자의 입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한단계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번역과 제국』)

로빈슨의 지적처럼, 소설 「포(Poe)」에서 수전 바턴은 “프라이데이의 억압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하여, 혀가 없는 ‘원시인’ 프라이데이의 몸의 발화를 ‘침묵’의 형식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서구의 언어로 반드시 번역해야만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이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비로소 혀가 ‘잘린’,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프라이데이의 ‘몸의 언어’와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를 ‘느끼게’ 되는데, 프라이데이가 ‘몸’으로 말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로빈슨크루소와 프라이데이

 

“난 프라이데이가 왜 춤을 추었는지를 알게 되었죠. (…) 이것은 우리 삶에 어떤 큰 그림이 있고, 충분히 오랫동안 기다리면 그 그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음을 알려줘요. 이것은 마치 양탄자를 짜는 이를 지켜보다보면 처음에는 그저 실타래만 눈에 들어오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바라보다보면 우리 눈앞에 꽃과 껑충거리는 유니콘, 작은 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지요.” (『Foe』, 103)


번역불가능성의
가능성


이렇듯 문화번역에 함의될 수밖에 없는 제국주의의 그늘은, 다양한 이론가들로 하여금 번역에 있어서 ‘번역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호명하게 했다.

먼저, 호미 K. 바바는 특별히 ‘이주’와 ‘이산’의 경험을 가지고 탈식민 세계에서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에 주목한다. 여기서 ‘이주’와 ‘이산’은 고정된 ‘민족주의’ 개념으로 결코 재현될 수 없는 ‘틈새’를 만들어 낸다. 바바가 주장하는 ‘틈새’ 개념이 곧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하여 ‘동화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요소”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벤야민이 “번역의 미결정성 혹은 한계성”이라고 설명한 문제와 맞닿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저항하는 요소”는 어떤 문화의 대척점으로 존재하는 문화 간 이분법적 경계가 아닌 서로에 대한 이질적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렇듯 바바는 “이분법의 경계, 혹은 전 지구화의 동일화 논리에 맞서는 ‘혼종성’의 담론으로서 번역을 부각”시키는 작업을 통해, ‘틈새’를 벌리고 번역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불안정성, 불확정성은 “‘낯섦이 세계 속에 틈입하는’ 매개조건”으로 작용하게 되고 나아가 제국주의 문화번역에서 견지되었던 이분법의 경계와 동일화 논리를 허물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바바가 생각하는 번역의 장이란, 문화적 의미가 끊임없이 협상되고 재구축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불가능성’이 언제나 이질적인 두 문화 간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번역에서 번역불가능성은, 반대로 “두 문화 간의 건널 수 없는 공백”으로 여겨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특정단어/개념에 대한 ‘주석달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타문화는 불가해한 것이라는 인식을 줌과 동시에, 타문화와의 공백을 두드러지게”만들기도 한다.

이에 탈식민주의 작가 및 번역가들은 이와 같은 주석달기를 거부하는 방식을 통하여 “제3세계의 문화가 불가해한 것이라는 인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번역을 통해 ‘이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주석이 달리지 않은 이질적인 개념은 먼저 “변별성을 각인하는 기호”로 자리하게 되고,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독해해나가면서 그 기호의 “뉘앙스”를 파악하게 만드는 것으로 자기정체성을 유지한다.

또한 스페인 선교사들이 기독교 교리를 타갈로그어로 번역하는 방식에서는 인종 및 문화 우월주의에 근거한 ‘번역불가능성’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토착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번역 작업을 수행하면서, “타갈로그어는 기독교 진리를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으며’, 특히 ‘신’, ‘성령’, ‘예수 그리스도’등의 정수를 표현하기에 기독교 교리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표현하는 단어에 대해서는 ‘번역’을 고려하지 않는다. 언어문화적인 우월성에 도취된 탓에 타갈로그어를 통한 기독교 번역의 불가능성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렇듯 ‘번역불가능성’은 어떠한 문화를 마주하는 번역가들의 태도와 인식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기대어, 타문화와의 ‘공존’과 ‘균형’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발현되는 ‘번역불가능성’에에 그 무게를 더욱 싣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베누티는, 무엇보다 “번역가의 태도와 인식, 의도 및 마음가짐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실질적인 번역 작업에 도입한 이론가이자 번역가”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에게 번역의 윤리란, 다름 아닌 ‘존중’이기 때문에 그는 “원본과 번역본 사이에 다양한 언어/문화적 차이들이 존재하며, 번역의 역할을 이 차이들을 서로 협상시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번역이야말로 ‘거짓 환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외국 텍스트의 외국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주는 번역’을 고수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원문과 구별”된 것임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렇듯 베누티의 번역가로서의 자의식과 실천은 ‘유창한 번역’에 감춰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고발하고 깨뜨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극단적으로 행해짐으로 인해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단어들을 양산하여 두 언어, 두 문화 간의 부조화가 지나치게 두드러질 위험” 또한 안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부조화’를 통해 독자들은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더욱 첨예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려한 번역은 소화하기 쉬운 것이지만, 대신 거기에는 타문화의 생생한 목소리가 묵살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오늘날 ‘완벽한’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조금은 다른 상상을 가능케 할지도 모르겠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치환이 아니라 타자를 수용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만남’ 그 자체, 그것도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는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혼란이, 오늘 날 번역가에게 언어·문화적 지식과 더불어 ‘존중’으로서의 태도와 인식 그리고 마음가짐을 요구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한국문학 번역의 문화번역: 한국문학의 문화번역 지점을 중심으로」, 이형진, 한국번역학회, 『번역학연구』17(3), 2016.

「번역의 윤리와 정치성: 문화번역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세계문학 번역사」, 정은귀,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Trans-Humanities』7(2), 2014.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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